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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피톤 프로젝트 3집 [각자의 밤] (2014. 9.) 음반



여러 모로 구닥다리지만 음악 듣는 방식만큼은 주머니 사정 때문에 최신 수준을 따라가고 있는 나는 음반매장을 거의 가지 않는다. 가끔 알라딘 중고서점에서 책을 살 때 음반 칸을 기웃거리는 정도인데, 그나마도 전문 음반매장이라고 할 수 없지 않은가. 그런 내가 집 근처에 있는 조그만 음반매장에 갔다. 몇 년 전부터는 카페를 겸하고 있는 곳이다. 그 앞을 지나갈 일은 많았는데 그동안 들러본 적이 없었던 곳에 들른 것은, 이 정도로 작은 음반매장이라면 나온 지 제법 시간이 지난 음반도 구할 수 있을 것 같은 느낌 때문이었다. 예상대로 그런 음반들이 제법 있었다. 오늘 내 품에 안겨 내 집에 오게 된 음반들 중 하나는 몇 곡을 미리 들어본 에피톤 프로젝트(차세정)의 3집 [각자의 밤]이었다.

에피톤 프로젝트 3집 [각자의 밤]
― 존재만으로도 소중한 음악가의 도전과 성숙

발매 : 2014. 9. 16.
평점 : ★★★★★

지금 키보드를 두드리는 굴지의 평론가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만한 후속 세대의 평론가들이 글을 쓰고 책을 낼 때가 오면, 차세정은 유재하, 윤상, 유희열, 김동률 등을 잇는 계보에 이름을 올리게 될 것이다. 나는 1990년대의 음악가들과 그들이 만든 곡을 사랑하지만, 2010년대인 현재에 와서 그들의 곡을 추억하는 것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이 시대의 젊은 음악가들을 관심 있게 지켜보는 일이라고 믿는다. 물론 이런 말이 그들을 꼭 좋게 평가해야 한다는 주장으로 이어지면 곤란하지만, 이번 3집의 결과물을 보건대 지금까지 에피톤 프로젝트는 훌륭한 행보를 보여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2006년에 데뷔하였으니 그도 이제 10년차 가수가 될 날이 얼마 남지 않았고, 데뷔 당시 스물셋이었던 나이는 올해 서른하나가 되었다. 그런 시점에 나온 [각자의 밤]은 에피톤 프로젝트가 보여줄 것이 많겠다는 예감을 하게 한다.

차세정의 목소리 때문에 종종 간과하게 되는 것은 그가 만드는 곡 대부분에서 악기의 밀도가 높았다는 사실이다. 이 점은 연주곡보다는 가사가 있는 곡에서 두드러진다. 피아노-기타-드럼-현악단이 들어차서 '강약약강강강약강중약'을 하듯 치고 빠지면서 '에피톤 클래식'을 만들어왔는데, 차세정 본인은 원형탈모가 올 뻔했다고 할 정도로 자신의 음악을 두고 고민했던 모양이다. 고민의 결과로 나온 3집에서 잘 알려진 '에피톤 클래식'에 충실한 곡은 <나의 밤> 하나 정도인데, 신시사이저를 활용함으로써 변화를 주고 있다. 화자와 대상 사이의 끝난 관계를 통해서 화자 자신을 돌아보는 성찰적인 가사는 제법 긴 여백처럼 느껴지는 간주와 어울리면서 조용한 밤을 흔든다. 여전히 '에피톤 클래식'이 옳다는 점을 <나의 밤>이 보여주고 있다.

하지만 다른 곡들은 차세정이 그동안 많은 경험을 통해서 새로운 양식에 도전하고 있음을 느끼게 한다. 전에 보여주지 않던 코드 진행과 관악단 편성은 주목할 만하다. 특히 음반을 여는 연주곡 <각자의 밤>에서 시작하여 <환상곡>-<낮잠>-<플레어>-<친퀘테레>에 이르는 3집의 1막은 새롭다. <각자의 밤>은 밤 10시 이후 라디오에서 들어가는 음악으로 써도 좋을 곡이다. <환상곡>과 <플레어>는 각각 선우정아와 아진(Azin)을 기용했는데, 에피톤 프로젝트의 음악에 적절한 객원가수였다고 본다. <낮잠>의 경우는 <나의 밤>과 비슷한 느낌을 주지만 악기 편성에 힘을 빼면서 <나의 밤>보다 가벼운 무게감을 보여준다. <친퀘테레>는 듣다가 Kings of Convenience와 윤상을 떠올렸다. 친퀘테레에 가면 차세정처럼 영감을 얻어서 돌아올 수 있는지 궁금해졌다. 잘 만든 음반 안에서도 특히 추천할 만한 수작이다.

연주곡 <불안>을 거쳐 <미움>-<유서>-<회전목마>-<환기>-<나의 밤>으로 이루어진 2막이 다소 가라앉는 곡들이다. <미움> 다음에 <시월의 주말>이 있는데, 이 곡이 <불안> 앞의 1막에 나왔다면 구성 면에서도 흠 잡을 곳이 없었을 것이다. 굳이 가라앉는 분위기의 2막에 <시월의 주말>을 포함한 것은 그 곡이 갖고 있는 애매한 감정선 때문이었을 것 같다. 이별의 기억에 마냥 슬픈 것은 아닌데, 그렇다고 마냥 그 기억이 미화되지도 않는 상황을 표현하고 있다. <미움>은 손주희를 객원가수로 기용한 타이틀인데, 처음 들었을 때부터 '에피톤 클래식'과 다르다는 생각을 하는 한편, 좋기는 하지만 타이틀로는 2% 부족하지 않을까 싶었다. 그러나 이 곡을 타이틀로 내걸면서 차세정은 '에피톤 클래식'을 넘어서려는 자신의 의지를 분명하게 드러냈다. <회전목마> 역시 손주희가 불렀는데, 대부분의 에피톤 프로젝트 객원가수가 그랬듯 기교 없이 진솔하게 부르고 있다. <미움>과 <회전목마>는 '에피톤 클래식'의 포화상태에 가깝게 편성된 악기 편성에서 약간씩을 빼면서 가수의 목소리에 집중하게 만든다. CD와 LP의 경우 차세정이 부른 <미움>이 실렸는데, 데모에 가깝게 만들어진 것이 또 다른 매력이 있다. 개인적으로는 차세정이 부른 판이 더 좋았다. 흔히 하는 "노래 잘 부른다"는 말에 부합하지는 않지만, 차세정의 목소리는 그 노래 잘 부르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닿지 않는 부분을 자극한다.

[각자의 밤]은 연주곡 2개를 포함해서 CD 기준으로 총 13개의 곡을 담고 있는데, 버릴 곡이 없는 훌륭한 음반이다. 차세정은 자신에게 성공을 안겨준 틀에서 벗어나 도전하며 더 성숙한 작품을 들려주고 있다. 2년 가까운 공백은 공백기가 아니라 성장기였다. 제법 길게 감상을 썼지만, 한 마디면 충분했다. "꼭 들어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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