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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카리 신지의 여자들 (1) 총론 EVA



에반게리온 감상 기획연재 1
이카리 신지의 여자들 (1) 총론


※ 이 글은 『신세기 에반게리온』 TV판(1995~1996), 『엔드 오브 에반게리온』(1997)으로 구성된 에반게리온 구판의 감상이다. TV판은 수정본(리뉴얼)을 따른다.

※ TV판은 TVA로, 『엔드 오브 에반게리온』은 EOE로 축약한다. TV판의 경우 [TVA-00]으로, 『엔드 오브 에반게리온』의 경우 [EOE-00]으로 장면 출처를 표시한다.

※ 글에 작품의 내용이 대량 누설된다. 따라서 스포일러 피해를 입고 싶지 않은 독자에게는 일독을 권장하지 않는다.


기획연재 시작의 변

세기말의 정서가 짙게 드리운 1990년대 중후반 일본 만화의 대표작, 『에반게리온』은 여러 매체에서 패러디되고 여러 관점에서 해석되고 있다. 20년이 넘도록 유지되고 있는 이 만화의 생명력은 일부 웹툰을 제외하면 만화와 거리를 두는 편인 나를 끌어들였다. 그래서 보았고, 만화를 내 관점에서 해석하여 정리하는 것이 꽤 의미 있는 취미가 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일반인의 관점에서 음악을 감상하고 올리던 행태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기획연재’라고 걸었지만 체계적으로 진행되지 않을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에반게리온』의 난해한 측면을 닮은 연재가 될지도 모른다. 일단 그 시작은 ‘연애물’로 접근하는 것이다. 작품에서 중요한 축이 인간관계이고, 그 중에서도 연애이기 때문이다. 기획연재의 시작은 「이카리 신지의 여자들」이라는 제목을 달고 있다. 하지만 그 이후 감상이 어디로 흘러갈지는 정해진 것이 없다. 의식의 흐름대로 진행할 심산이다.

마성의 남자, 신지군

『에반게리온』의 주인공을 한 명만 꼽자면 에바 조종사 이카리 신지일 것이다. 어머니와 잔혹하게 이별한 과거를 지녔고 아버지와 관계가 이보다 심각하기 어려울 만큼 뒤틀린 신지는 비극의 남주인공이다. 소심하고 타인을 과도하게 의식하여 대부분의 대답은 “예”, “응”으로 일관되고, 현실을 향한 불만을 대부분 자신 안에 쌓아두고 있다. 에바 조종사로서 소시민적 영웅, 또는 영웅적 소시민의 삶을 살고 있다. 하지만 알고 보면 신지는 마성의 남자이다. 에바를 조종하는 동료 아야나미 레이, 소류 아스카 랑그레이가 모두 신지에게 연정을 품은 여자들이다.

신지와 15세 차이 나는 보호자 카츠라기 미사토도 예외는 아니다. 둘째 레이의 사망 직후 공황에 빠진 신지를 위로한답시고 성관계를 암시적으로 제안하는 장면[TVA-23], 신지를 초호기로 보내면서 죽기 직전에 ‘성인의 키스’를 선사하고 “돌아오면 이 다음도 하자”고 말해주는 장면[EOE-25]에서 이를 알 수 있다. 이전에 연인 카지 료지의 사망[TVA-21)이라는 결정타가 있었지만, 두 장면은 미사토가 신지를 향한 금지된 충동을 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에반게리온』의 여주인공들이 모두 신지와 사랑에 빠진 셈이다.

여자만 신지에게 반한 것이 아니다. 아담(제1사도)의 영혼을 지닌 남자 나기사 카오루조차 신지를 좋아한다고 당사자에게 솔직하게 말해주었다[TVA-24]. 릴리스(제2사도)의 영혼을 지닌 레이가 신지에게 단순한 호감 이상의 감정을 가졌으니, 카오루가 그런 것이 마냥 괴이한 일도 아닐 것이다. 반인반신(半人半神)의 존재라고 할 수 있는 소년소녀까지 홀린 신지의 매력은 착하다는 것 외에 뚜렷하게 설명되지 않는다.

그런데 ‘마성의 남자’라는 신지의 캐릭터가 흥미로운 것은 신지가 그토록 부정하고 증오한 아버지 이카리 겐도와 닮아있기 때문이다. 겐도에게 반한 여자들 면면도 보통이 아니다. 세계구급 과학자 이카리 유이, 아카기 나오코[TVA-21], 아카기 리츠코[TVA-23, EOE-26]가 그랬다. 심지어 유이는 스승 후유츠키 고조에게 “다른 사람들이 모르는” 겐도의 매력이 있다고 주장하기까지 하였다. 겐도와 신지의 캐릭터는 매우 다르지만 타인을 향한 마음의 문을 닫는 성격, 쉽게 설명되지 않는 마성의 매력에서 부자 사이의 연속성을 볼 수 있다.

목숨을 바치는 보호자

『에반게리온』은 여자의 죽음과 희생을 부각한 만화이다. 유이는 아들 신지와 인류의 구원을 위하여 에바 초호기에 자진하여 흡수되었다[TVA-21, EOE-26]. 레이는 대사도전에서 두 번에 걸쳐 신지를 지켜주고[TVA-06·23] ‘인류보완’의 최후에 신지의 결정에 따르며 시각적 충격을 주는 최후를 맞았다[EOE-26]. 미사토는 전략자위대가 침입하였을 때 신지를 엄호하다가 총상을 입고 사망하였다[EOE-26]. 아홉 기의 양산형 에바를 상대하다가 패배하고 최후를 맞은 아스카의 경우[EOE-25]는 묘사하기조차 꺼려질 만큼 참혹하였다.

자신을 위하여 희생할 여자, 바꿔 말하면 보호자가 여럿 있었기 때문에 신지는 겐도보다 축복받은 존재였다. 위의 예시에서 아스카를 제외한 모든 여자가 신지를 지키겠다는 목적에 따라 죽었다. 신지는 타인에게 상처받고 신뢰를 잃는 와중에도 타인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마음을 종종 표현하였는데, 레이와 미사토가 그런 신지의 말을 들은 사람들이었다. 레이의 감정을 깨워준 말들[TVA-06·15·17], 레리엘(제12사도)에 흡입되었다가 돌아와서 미사토에게 남긴 “한 번 더 보고 싶었다”는 말[TVA-16] 등이 그렇다.

겐도의 여자들 중 겐도를 위하여 목숨을 바친 사람은 없다. 인류애를 내세운 유이의 경우는 제쳐두더라도, 아카기 모녀 중 딸 리츠코는 심지어 겐도를 살해하고 네르프의 자폭 기능을 발동하려고 시도하였다. 마기 시스템의 일부인 캐스퍼로 남은 어머니 나오코 때문에 실패하였다는 사실은 나름대로 의미가 있을 것이다[EOE-26]. 하지만 리츠코의 위협은 겐도의 배신[TVA-23], 필요에 따라 쓰거나 버린 겐도의 잔혹성[EOE-25]이 초래한 파국이었다. 자신의 진심은 주지 않은 채 타인의 진심마저 성공을 위한 도구로 활용하며 살아온 겐도는 레이에게 배신당하며 몰락하였다[EOE-26].

신지의 여자들은 대부분 목숨까지 바칠 마음이 있는 보호자였다. 이들은 다소간 모성을 공유한다. 유이는 신지의 어머니였다. 신지가 제3신도쿄시로 온 이래 보호자를 자임한 미사토, 유이의 클론인 레이도 신지에게 모성을 가진 존재들이다. 하지만 미사토와 레이의 행동은 모성만으로 설명되지 않는 부분이 있다. 타인의 공포를 느끼더라도 진심으로 소통하려는 노력을 멈출 수 없다는 『에반게리온』의 메시지를 생각해본다면, 신지와 그의 여자들 사이에서 이루어진 소통의 가치를 높이 평가할 이유가 충분하다.

신지가 레이와 카오루 앞에서 회상한 단체사진[EOE-26], 레이와 아스카의 위치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레이는 얼굴이 보이지 않지만 신지 뒤의 푸른 머리카락을 보면 신지의 뒤를 지켜보며 서 있는 것 같다.
아스카는 신지의 어깨에 왼손을 얹고 서서 오른손으로 수화 I-L-Y(=“I Love You.”)를 보여주고 있다.

결론은 아스카, 다시 타인의 공포를 마주하자

만화 중반에 아스카가 등장하여 신지에게 저돌적으로 애정공세를 펴면서[TVA-09·10·15] 『에반게리온』에서 애정전선이 차지하는 비중이 커졌다. 이는 자연스럽게 시청자들에게 “신지의 연인은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던지게 만들었다. 『에반게리온』 제작진은 TVA에서 인류보완 과정 끝에 신지가 상상한 장면을 삽입하여 아스카가 우세한 가운데 레이에게도 가능성이 있다는 정도로 열어두었지만[TVA-26], EOE에서는 신지를 향한 아스카의 절박한 사랑을 보여주었고 결말에서 아스카를 서드 임팩트 이후 신지의 짝으로 확정하였다[EOE-26].

TVA 중 세 회차에서 신지-아스카가 카지-미사토와 비슷한 장면을 연출하였다는 사실은 영어권 『에반게리온』 위키위키에서 잘 짚어냈다[TVA-09·11·15][EvaWiki]. 유이의 복제인간이자 더미 플러그의 핵심인 레이, 연인이 된다면 원조교제일 수밖에 없는 미사토는 신지가 연인으로 선택하기에 어려운 존재들이었다. 신지가 의식을 잃은 채 병상에 누워있는 아스카를 찾아가서 “미사토 씨도, 아야나미도 무섭다”고 한 것[EOE-25]은 당시 미사토가 황폐한 정신을 추스르지 못하였고 신지가 레이의 진실을 알아버렸던 상황과 연관된다. 하지만 이는 신지가 자신의 마지막 보루로 아스카를 선택하였음을 보여주기도 한다. 물론 아스카는 이런 식으로 선택되기를 원하지 않았다[EOE-26].

신지는 레이를 항상 이름 대신 성인 아야나미로 불렀다. 미사토나 아스카는 물론 리츠코까지도 성이 아닌 이름으로 불렀던 것을 고려하면 특이한 상황이다. 레이는 신지와 더 일찍 만났고 훈훈한 장면도 가끔 연출하였지만, 거리감이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신지는 레이의 진실을 안 이후 두려워하였고, 서드 임팩트가 시작할 때 릴리스(리리스)의 신체로 돌아간 거대 레이, 양산형 에바들이 형상화한 레이를 미친 듯이 거부하였다[EOE-26]. 비록 레이가 서드 임팩트를 신지와 함께 주재하고 신지의 마음을 되돌리는 역할을 하였지만, 신(神)과 모성의 대리인이라는 역할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인류의 최후와 재시작에서 신지와 아스카, 두 사람이 남았다. ‘타인의 공포’에 시달렸던 두 사람 모두에게 거대한 도전이 될 것이다. 두 사람은 보살핌이 절실한 시점에 ‘받는 사랑’이 최소치도 채우지 못하였고, ‘주는 사랑’에 매우 서툴렀다. 신지의 연인으로 보호자인 레이가 아니라 피보호자일 가능성이 높은 아스카가 선택된 것은 자신만의 세계를 깨고 타인과 마주해야 하는 인간의 숙명을 보여준다. 다행히도 둘의 미래는 나쁘지 않을 것 같다. 인류보완 중에 상상한 평행세계에서 신지는 츤데레 아스카의 은근한 보살핌을 받았고[TVA-26], 인류보완이 중단되고 현실로 돌아온 이후 아스카는 신지에게 자상해졌고 동시에 솔직해졌다[EOE-26]. 『에반게리온』은 타인의 공포를 마주하면서 조금씩 서로 알아가고 관계의 진보를 이룰 수 있다는 믿음을 파격적으로 보여주었다.

덧글

  • 범골의 염황 2016/03/27 11:50 #

    은근히 신지가 매력적으로 묘사되는 감이 있습니다. 상황이 좀만 더 좋게 흘러갔어도 전형적인 성장형 캐릭터의 면모를 보여줬을텐데 각본가 양반이 그렇게 놔두질 않으니 참.
  • 京靑 2016/03/28 17:26 #

    동의합니다. 극한에 몰린 소시민적 영웅, 평범한 소년의 이야기이기에 오히려 더 큰 의미를 지닌다고 생각하지만, 신지에게 주어진 상황이 매우 가혹했던 건 분명합니다.
  • 2016/03/28 17:39 #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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