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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카리 신지의 여자들 (2) 카츠라기 미사토 EVA



에반게리온 감상 기획연재 2
이카리 신지의 여자들 (2) 카츠라기 미사토


※ 이 글은 『신세기 에반게리온』 TV판(1995~1996), 『엔드 오브 에반게리온』(1997)으로 구성된 에반게리온 구판의 감상이다. TV판은 수정본(리뉴얼)을 따른다.

※ TV판은 TVA로, 『엔드 오브 에반게리온』은 EOE로 축약한다. TV판의 경우 [TVA-00]로, 『엔드 오브 에반게리온』의 경우 [EOE-00]으로 장면 출처를 표시한다.

※ 글에 작품의 내용이 대량 누설된다. 따라서 스포일러 피해를 입고 싶지 않은 독자에게는 일독을 권장하지 않는다.


주인공

안노 히데아키는 『신세기 에반게리온』 제작을 발표할 당시 두 명의 “상처 받는 것을 극도로 두려워하는 (…) 부적합해보이는” 주인공을 내세운다고 밝혔다. 이 발표에서 언급된 ‘14세 소년’은 이카리 신지, ‘29세 여성’은 카츠라기 미사토이다. 미사토는 신지와 더불어 투톱으로 주인공 대접을 받을 자격이 충분한 인물이다. 우선 극 전개를 고려할 때 그렇다. 시청자가 에바를 둘러싼 진실을 확인하는 과정은 후유츠키와 리츠코의 설명이나 회상[TVA-21·23]을 제외하면 미사토가 진실을 추적하는 과정[TVA-15·17·19·23, EOE-25]을 따라가게 된다. 미사토는 성인 등장인물들과 다소 거리를 두고 있는 신지를 대신하여 에바의 진실에 접근하는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다.

『에반게리온』을 ‘고슴도치 딜레마’(hedgehog’s dillemma)를 떨쳐내고 타인과 소통할 것을 주문하는 성장만화로 본다면, 미사토는 성인 대표로서 청소년 대표 신지와 더불어 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다. 자세히 보면 이 만화의 성인들은 대부분 어른 구실을 하지 못한다. 젤레(제레)는 전 인류의 집단자살을 자신들의 주도하에 수행한다는 것 외에 어떤 미래 전망도 없는 권력집단이고, 겐도는 유이를 만나겠다는 것 외에 뚜렷한 목적이 없는 계획을 진행하면서 수많은 사람들을 희생양으로 내몬 냉혈한이다. 20세기 군국주의, 제국주의의 망령을 대변하는 성인들의 틈바구니에서 미사토는 자신을 반성하고 그것을 승화하는 거의 유일한 인물이다. 또한 미사토는 최소의 양심을 상실한 성인들의 행동으로 초래된 대재앙, 세컨드 임팩트의 현장에서 생환하여 거대한 트라우마를 안고 살아가는 인물이다[TVA-12]. 한계와 가능성 모두 뚜렷하게 보여주는, 사람냄새 나는 사람이다. 이만하면 주인공 자격은 충분하다.

전반부에 한정되지만 미사토는 자칫 어둠의 심연으로 내려앉을 수 있던 극의 분위기를 명랑하게 만들어 완급을 조절해주는 인물이었다. 처음부터 차중에서 거듭 체면을 구기는 장면[TVA-01], 카레로 펭귄 펜펜까지 충격을 받게 만든 장면[TVA-05], 카지와 함께 등장한 몇몇 장면이 대표적이다[TVA-08·11]. 감정이 메마른 것처럼 보이는 레이, 감정을 비틀거나 과장하는 아스카보다 직설적 표현을 잘하던 인물이었기에 이런 연출이 설득력을 지닐 수 있었다. 또한 성인이었기 때문에 섹스어필에 큰 제약이 없었다. 미사토의 의상은 제법 노출이 있는데, 신지는 여기에 부담을 느끼기도 한다[TVA-07]. 성교 장면이 등장인물 중 가장 확실하게 묘사된 것도 미사토였다[TVA-20·25, EOE-26]. 이 또한 신지의 시선에서 보여줄 수 없는 성인의 세계를 보여주는 효과를 지닌다.

고슴도치 딜레마를 깨닫고 재회한 신지와 미사토 [TVA-04]

신지의 보호자, 실존하는 가족

미사토는 신지에게 낯선 제3신도쿄시에서 처음 만난 실존인물이다[미주 1]. 미사토외 신지의 첫 접촉은 상사와 부하의 관계였다. 아버지와 같이 살지 않게 된 신지를 자신의 집에 거두어들였지만[TVA-02], 신지와 관계되는 미사토의 역할은 상사와 보호자 사이에서 갈등이 있었다. 신지는 샴셸(제4사도)전에서 명령을 위반한 뒤 미사토에게 추궁을 당할 때 가식적 대답으로 일관하여 미사토와 갈등을 일으켰다. 미사토는 신지의 가출을 알았을 때 그럴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하지만, 돌아온 그의 영혼 없는 대답을 듣다가 결국 폭발하였다[TVA-04]. 하지만 미사토는 ‘고슴도치의 딜레마’를 곱씹으며 신지의 표현방식을 이해하였고, 떠나려고 하는 신지를 찾아가며 재회와 화해를 이루었다[TVA-04: Hedgehog’s Dillemma].

이후 미사토의 역할에서 보호자가 중심이 되었고, 훈육자 역할은 결정적 순간에 하는 정도가 되었다[TVA-19·24, EOE-25]. 미사토의 힐문에 가식적 대답으로 넘어가던 신지는 얼마 지나지 않아서 미사토를 가족으로 받아들였다. 미사토가 신지의 진로상담일을 맞아 학교에 가겠다고 하면서 “이것도 일”이라고 하자, 신지는 일 때문에 바쁜 미사토를 걱정하고서도 막상 그런 소리를 들어서 아쉬운지 모호한 말투로 “일입니까….”라고 물었다. 그 말에 미사토는 아차 싶다는 표정을 짓는다[TVA-07]. 두 사람 모두 상대를 상사-부하의 업무상 관계가 아니라 가족에 가까운 관계로 의식하였음을 상징하는 장면이다. 또한 미사토가 허점을 보이는 상대가 카지, 리츠코 같은 오랜 친구들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신지는 이미 미사토에게 가족과 다를 것이 없었다. 신지가 확실하게 미사토를 가족으로 인식한 것은 친구들이 미사토의 허점을 볼 수 있는 신지의 처지를 일깨워주었을 때였지만[TVA-07], 가족이라는 인식은 이미 잠재하였다고 판단된다.

미사토와 신지는 모두 미성년에 실제 가족이 해체되는 경험을 하였다[TVA-12]. 혈연적 가족은 트라우마로 얼룩진 과거로 현재에 영향을 미치지만, 실존하는 가족은 당장 현재의 삶에서 더욱 중요한 의미를 가질 수 있었다. 신지가 미사토의 집에 들어간 이후, 미사토를 중심으로 ‘유사가족’이 형성되었다. 리츠코가 미사토의 자책에 비아냥거리면서 한 ‘가족놀이’라는 말[TVA-22], “돌아갈 집이 있다는 사실은 행복으로 연결된다”는 카오루의 발언[TVA-24]은 미사토의 집에서 벌어진 상황을 설명하기에 적절하다. 혈연적 가족에서 채워지지 못한 애정과 유대가 유사가족에서 축적되면서, 미사토와 신지의 유대는 빠르게 유사모자관계로 진전되었다. 여러 장면에서 이런 관계를 확인할 수 있다.

신지가 초호기에서 정신을 잃었다가 의식을 찾는 장면은 미사토가 “신지군!” 하고 부르는 장면과 이어지는 경우가 많다[TVA-02·16·20]. 레리엘(제12사도)전에서 신지가 명령을 어기고 나갔다가 레리엘에게 흡입되었을 때 미사토는 신지가 돌아오면 혼내주겠다고 별렀지만, 막상 돌아온 신지를 본 순간 그를 끌어안고 울었다. 신지가 “한 번 더 보고 싶었다”고 말하자 미사토는 더욱 서럽게 울었다[TVA-16]. 유사모자관계가 쌍방에서 인식되었음을 상징하는 장면이다. 제르엘(제14사도)전에서 싱크로율 400%를 기록하여 초호기에 흡수된 신지를 구출하는 작업이 실패하여 조종복(플러그 수트)만 배출되자 “사람 하나 못 살리는 게 무슨 과학이야!”라며 통곡하는 미사토, 이에 응답하는 것처럼 인간의 육신으로 돌아온 신지의 모습[TVA-20]도 이 관계의 연장선상에 있다.

신지의 의식이 돌아오자마자 보인 것은 눈이 그렁그렁한 미사토였다. [TVA-16]

유사가족의 미완과 파괴

아스카까지 거두어들이면서[TVA-09] 미사토의 집에 사는 유사가족은 확대되었다. 더불어 미사토와 카지의 연인관계가 점차 회복되었다[TVA-15·16·20]. 이 과정이 완성되어 미사토가 카지와 결혼하였다면, 유사가족은 더욱 완결되거나 발전적으로 해체되었을 수 있다. 아스카가 미사토를 어른으로 취급하지 않는 경향이 있었기 때문이다. 같은 발화에서 지칭할 때 미사토를 미사토로, 카지를 카지 씨로 부른 아스카의 행태는 주목할 필요가 있다[TVA-16]. 대부분의 성인에게 존대를 꼬박꼬박 쓰지 않는 것이 아스카의 화법이지만, 그녀가 ‘~씨’를 붙이지 않고 이름만 부르는 경우는 미사토뿐이다. 편하게 여겨서 그랬을 수 있고, 카지와 비교하였을 때 어른으로 느껴지지 않아서 그랬을 수도 있다.

카지-미사토 부부가 형성되었다면 네 사람 사이의 관계에 크게 두 가지 가능성을 상정할 수 있었을 것이다. 첫째, 카지-아스카의 유사부녀관계와 미사토-신지의 유사모자관계가 결합하여 하나의 가정이 된다. 둘째, 주로 카지를 향한 아스카의 환상이 정리되면서 기존 유사가족관계가 정리되고 신지-아스카 커플이 독립한다. 하지만 카지의 사망[TVA-21], 미사토와 아스카의 관계 파탄[TVA-22], 아스카의 연이은 정신적 파탄[TVA-22·23·24]으로 두 가지 가능성은 모두 상상에 머무를 수밖에 없게 되었다. 『에반게리온』 후반부 분위기는 급격히 하강하는데, 미사토의 집을 본거로 하던 유사가족의 파탄은 EOE 직전의 최저점이었다. 혈연적 가족에서 느끼지 못한 소소한 행복을 겨우 찾았던 미사토, 신지, 아스카는 동반 하강하고 말았다. 미사토와 아스카는 각각 방문을 닫은 채 소통을 끊었고[TVA-23], 신지도 귀가를 꺼렸다[TVA-24]. 펜펜마저 험악한 집안 분위기 때문인지 사람에게 마음을 주지 않고 TV만 보는 지경이 되었다[TVA-23].

카지의 사망으로 크게 무너진 미사토는 유사가족의 보호자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였다. 미사토도 자신의 책임을 알고 있었다. 그녀는 당시 상황을 자신의 실격으로 표현하였고[TVA-22], 사망 직전에는 아스카를 대하던 자신의 태도를 후회하였다[EOE-25]. 하지만 이미 유사가족은 파괴되었고, 신지와 아스카 사이의 유대도 여러 상황이 맞물리면서 파괴된 상태였다. 유사가족의 파괴는 서드 임팩트에서 신지의 극단적 선택을 불러온 하나의 원인이었다. 신지와 아스카 사이에 최소로 남아있던 유대마저 험악한 집안 분위기 속에서 무너졌기 때문이다. 신지의 의식 속에서 아스카의 목을 졸랐던 장소가 미사토의 집이었던 것도 이런 상황과 밀접한 관계를 지닐 것이다[EOE-26]. 슬프게도, 아스카를 포함한 유사가족 사이의 마지막 소통은 양산형 에바 섬멸이라는 임무를 위한 미사토의 지시였다[EOE-25].

비록 미사토가 마지막에 신지를 지키려고 목숨을 바쳤지만, 유사모자관계에 이미 균열이 있었다는 점을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카지의 사망으로 무너진 미사토는 둘째 레이의 사망으로 무너진 신지에게 성적 접촉을 시도하였다. 신지는 단호하게 이를 거절하였다. 신지의 방을 나온 미사토는 신지가 여자를 두려워한다고 여기다가, 이내 사람을 두려워한다고 생각을 바꾸었다[TVA-23]. 이 장면에서 신지가 미사토에게 여전히 유사모자관계를 기대한 반면, 미사토는 신지를 위로하면서도 그에게 의지하고 싶어하는 자신을 인식한다. 미사토가 최후에 신지에게 선사한 ‘성인의 키스’[EOE-26]는 여러 의미를 내포하는데, 그 중 하나는 유사모자관계에서 금지되었던 여자로서 자신의 원초적 사랑을 전하는 유언이었다[미주 2].

미사토는 신지에게 마지막 선물 두 가지를 주었다. 하나는 희망, 다른 하나는 성인식. [EOE-25]

안녕히 가세요, 어머니

미사토는 완벽한 영웅이 되기에는 부족한 인물이다. 그녀 자신이 처참하게 무너졌고, 유사자녀들이 상처 받는 것을 막지 못하였다. 하지만 그렇기에 더 소중하고 현실적 모범이 될 만한 인물이다. 인간이 자신의 불완전성을 인정하지 않고 모든 낙관을 포기하는 순간, 젤레의 광기는 언제나 찾아올 수 있다. 서드 임팩트 당일, 임팩트를 막기 위하여 가장 분주하게 뛰어다닌 것은 미사토였다. 그녀보다 더 어른 노릇을 할 책임이 있던 젤레와 겐도 모두 임팩트를 일으키기 위하여 혈안이 되어있는 동안 말이다[EOE-25]. 불완전한 인간의 한계를 인정한 가운데 최선을 추구하는 미사토의 모습은 그녀가 『에반게리온』의 주인공, 신지의 어머니이자 스승, 그리고 『에반게리온』의 메시지를 상징하는 인물이 되기에 충분한 자격이 있음을 증명한다.

미사토는 세컨드 임팩트 때 자신의 아버지에게 받았던 십자가 목걸이를 신지와 작별하면서 넘겨주었다[EOE-25]. LCL의 바다에서 레이와 하나가 되었던 신지는 미사토가 준 목걸이를 보면서 자신의 결정이 잘못되었음을 깨닫고 보완을 취소한다[EOE-26]. “살아있는 한 희망은 있다”는 유이와 같은 낙관론은 미사토를 통해서는 “살아남을 수 있는 것은 살 의지를 가진 자뿐”이라는 발언[TVA-24]을 거쳐 목걸이를 주는 행위로써 신지에게 전달되었다고 할 수 있다. 원래 낙관론을 표방하던 미사토였지만[TVA-02], 절망에 빠진 상황에서도 이를 포기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더 의미가 있다.

어쩌면 미사토가 신지에게 남긴 최후의 자기 고백이 유이의 낙관론보다 더 파급력이 강한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유이는 세계적 과학자이자 젤레의 구성원, 전말을 알기 어려운 계획의 입안자였다. 유이의 낙관론은 극에서 매우 파편적으로 제시되고, 타인과 공명하려는 노력이 거의 보이지 않는다. 미사토는 자신의 삶을 걸어서 신지에게 인간의 한계보다 가능성에 기대를 거는 낙관론을 깨워주었다. 영웅적 사명을 띠었지만 범인(凡人)이나 소시민에 가까운 인격의 소유자였던 신지에게 깊은 반향을 일으킨 쪽은 미사토였을 것이다.

신지에게 미사토의 역할은 ‘성인의 키스’로 종료되었다. 마지막 키스는 유사가족의 어머니가 아들에게 성인이 되었음을 선언한 것이다. 그래서였을까, 미사토는 LCL의 바다에서 살아있는 육신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인류보완 중단 이후의 결말에서 그로테스크한 레이의 반두상(半頭像) 다음 장면은 십자가가 새겨진 묘표(墓標)이다. 십자가의 형체를 보면 미사토의 목걸이에 있던 것이 묘표로 옮겨졌음을 알 수 있다. 유이의 클론 레이, 실존하던 어머니 미사토의 영면을 상징하는 장면은 「ONE MORE FINAL」 직전 신지가 유이에게 남긴 말 “안녕히 가세요, 어머니.”와 이어진다[EOE-26].

타인과 함께 할 새로운 현세로 돌아온 신지는 이렇게 세 명의 ‘어머니’와 이별하는 과정을 거쳤다. 서드 임팩트 이후 세계는 타인의 공포를 떨쳐내고 어른으로 한 걸음 나아가려는 신지에게 어머니의 품에서 나와 독립할 것을 요구한다. 그렇게 세 명의 ‘어머니’는 신지를 떠났지만, 결국 마지막까지 실존하는 ‘어머니’는 미사토일 것이다. 유이와 레이는 신격(神格)을 띤 존재들이고 현세에서 모습을 드러내지 않겠지만, 미사토는 십자가가 새겨진 묘표라는 실존하는 형태로 현세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미사토는 신지의 새로운 삶에서도 희망의 시각적 상징으로 실존할 것이다.

[미주 1] 미사토를 처음 만난 실존인물로 지칭한 것은 미사토가 신지 앞에 도착하기 전 신지가 아야나미 레이를 먼저 보았기 때문이다. 이때 레이는 당시 부상 중인 둘째 레이와 다른 존재인 것이 확실하다. 『에반게리온』 구판 전체를 탁월하게 분석하였던 엄디저트는 신지가 미사토를 기다릴 때 만난 레이를 셋쩨 레이로 보는 흥미로운 해석을 제시하였다. [루리웹_엄디저트]

[미주 2] 엄디저트는 심리학 이론을 바탕으로 『에반게리온』 최후반부에 미사토가 신지에게 취한 행동을 설명하였다. 현재까지 나온 설명 중 가장 치밀하다고 생각한다. [루리웹_엄디저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