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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카리 신지의 여자들 (3) 아야나미 레이 上 EVA



에반게리온 감상 기획연재 3
이카리 신지의 여자들 (3) 아야나미 레이 上


※ 이 글은 『신세기 에반게리온』 TV판(1995~1996), 『엔드 오브 에반게리온』(1997)으로 구성된 에반게리온 구판의 감상이다. TV판은 수정본(리뉴얼)을 따른다.

※ TV판은 TVA로, 『엔드 오브 에반게리온』은 EOE로 축약한다. TV판의 경우 [TVA-00]로, 『엔드 오브 에반게리온』의 경우 [EOE-00]으로 장면 출처를 표시한다.

※ 글에 작품의 내용이 대량 누설된다. 따라서 스포일러 피해를 입고 싶지 않은 독자에게는 일독을 권장하지 않는다.


레이, 신(神)의 이름

이카리 신지의 여자들 중 아야나미 레이를 논하기에 앞서, 『에반게리온』의 종교적 성격을 간략하게 파악해보려고 한다. 『에반게리온』은 기독교 세계관을 치밀하게 변용한 작품이다. 우선 작품의 제목부터 복음(Evangel), 이브(Eve)와 사도(Angel)의 결합을 의미하는 중의법으로 해석된 바 있다[루리웹_엄디저트]. 주목할 것은 사도라는 존재이다. 『에반게리온』의 설정상 신에 가장 가까운 존재는 제1시조민족이다. 하지만 철저히 작중에서 보이는 것에 기초한다면 신에 가까운 존재는 인간을 공격하는 사도들의 조상 아담(제1사도)과 인간(릴림, 제18사도)의 조상 릴리스(리리스, 제2사도)이다. 릴리스의 정체가 공개되기 전 리츠코의 입으로 아담을 신으로 지칭한 것을 참고할 만하다[TVA-23].

『에반게리온』에서 신은 제대로 된 대우를 받지 못하는 존재이다. 아담은 실험당하다가 세컨드 임팩트를 일으켰고[TVA-21] 겨우 태아 수준으로 복원되었다[TVA-08]. 릴리스는 하반신 없이 십자가에 못이 박히고 롱기누스의 창[미주 1]에 찔려있는 상태이다[TVA-15]. 게다가 이들을 이용하려는 젤레(제레)와 겐도 등 인간의 음모도 치밀하게 진행된다. 종교시설이 등장하지 않고 누구 하나 절박한 상황 앞에 기도하는 사람이 없는 것을 보면, 『에반게리온』의 배경이 되는 사회는 이미 신앙심 같은 것은 바닥난 곳일지도 모른다. 아야나미 레이는 세상에 신성(神性)을 향한 경외나 존중이 없었기 때문에 태어날 수 있는 존재였다.

레이는 이카리 유이의 유전자, 릴리스의 영혼으로 만들어진 존재이다. 그녀의 이름은 유이의 임신 당시 아들이면 신지, 딸이면 레이로 짓겠다던 계획[TVA-20]에서 딴 것이 분명하다. 작중에서 레이의 이름은 가타카나로 썼지만, 작명 하나 허투루 하지 않는 『에반게리온』의 특성을 생각할 필요가 있다. 레이라는 일본식 독음은 한국에서 ‘령’으로 읽히는 여러 한자에 적용된다. 그런 한자들의 의미 중 가장 주목할 것은 ‘영혼’[靈]이고, “거느리다”[領]와 “명령하다”[令]도 주목할 만하다. 신적 존재인 릴리스의 영혼과 지위가 레이라는 이름에서 표출된다. 신지로 발음되는 어휘를 살펴보면 레이의 신성은 더욱 뚜렷해진다. 신지는 심사(心事), “신을 섬긴다”는 뜻을 지닌 신사(神事), “신하로서 섬긴다”는 뜻을 지닌 신사(臣事)의 일본식 독음이다. 레이와 신지는 이름에서 대구를 이루는 한 쌍이다.

신이 신을 만났을 때? [TVA-24]

이름만 레이의 신성을 보여주는 것은 아니다. 셋째 레이는 ‘인간형 사도’인 카오루(타브리스, 제17사도)가 동질성을 느낄 정도로 흡사한 존재였다. 같은 회차에서 레이는 카오루가 AT필드로 쳐놓은 결계를 역시 AT필드로 뚫고 그 안에 들어간 것으로 그려진다[TVA-24]. 첫째와 둘째의 경우는 확인할 수 없지만, 최소한 셋째 레이는 에바에 타지 않고도 AT필드를 전개할 수 있었던 점에서 인간형 사도로 보더라도 무리가 아닐 것이다. 신지의 눈앞에 환영(幻影)처럼 나타난 것[TVA-01, EOE-26], 미사토와 리츠코를 포함하여 여러 사람들이 죽을 때 부유하는 형체로 그 장면을 지켜본 것[EOE-25·26]도 레이의 초월성을 보여준다.

신의 이름과 능력을 지녔지만 레이의 삶은 영광 가득한 신의 모습과 거리가 멀었다. 본인의 잘못으로 벌어진 일이지만 어렸을 때 목이 졸려 죽는 경험을 하였다[TVA-21]. 무엇보다 에바 0호기 조종사라는 극한직업이 그녀에게 고난을 가져다주었다. 레이의 역할은 주로 공격보다는 방어나 보조였기 때문에 그만큼 희생도 컸다. 0호기와 둘째 레이가 함께 산화한 뒤[TVA-23]에 등장한 셋째 레이가 비로소 초월적 권능을 발휘하였다. 하지만 그것도 릴리스로 돌아가기 직전과 돌아간 직후의 짧은 순간뿐이었다. 대부분의 삶에서 그녀는 고난을 받고 희생하며 살았다. 릴리스와 레이는 ‘수난(受難)하는 신’이었다.

삼위일체로 그려진 어머니

레이를 상징하는 숫자로 얼핏 떠오르는 것은 0이다. 레이라는 이름이 0의 한자 령(零)과 같은 발음이고, 레이가 조종하는 에바가 0호기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글에서 레이를 상징하는 숫자로 주장하려는 것은 0이 아니다. 레이를 상징하는 숫자는 3이다. 근거는 다양하다. 레이는 첫째부터 셋째까지 세 명이 있었다. 레이가 타인과 맺는 관계는 3으로 얽힌 것이 많은데, 이는 차차 다루기로 한다. 레이와 3의 강한 연관성은 레이를 신으로 이해하였을 때 확연하다. 레이의 삶은 삼위일체(Trinity)라는 원리를 충실하게 따르고 있다. 성부-성자-성령, 한 분의 신이 지닌 세 가지 위격이라는 기독교 교리는 이해하기도, 설명하기도 쉽지 않지만 3을 강하게 의식하는 문화요소의 원형이 되었다.

레이는 인류보완 단계까지의 신 릴리스와 인류보완 이후 신이 된 초호기의 영혼 이카리 유이에서 가져온 구성요소들로 만들어졌다. 릴리스-레이-유이 삼위일체는 『에반게리온』에서 인간을 심판하고 구원하는 신이었다. 다만 레이와 유이의 관계를 감안하면 삼위일체가 완결된 형태였다고 보기는 어렵다. 바르디엘(제13사도)전에서 신지가 얻은 트라우마 때문에 초호기가 신지 이외 모두의 탑승을 거부할 때, 레이도 거부당하고 타격을 입었다[TVA-19]. 하지만 작품 전반에서 강조되는 것은 레이와 유이의 밀접한 연관성이다. 이는 나오코가 첫째 레이를 보면서 직감한 것이었고[TVA-21], 신지가 둘째 레이와 가까워지고 초호기에서 어머니의 존재를 인식하면서 체감한 것이었다[TVA-15·16]. 서드 임팩트가 시작될 때 유이가 레이의 의미를 신지에게 알려주자 뒤이어 레이가 신지에게 무엇을 원하는지 물어보는 장면[EOE-26]도 둘의 밀접한 관계를 보여준다.

마주한 레이와 초호기 [EOE-26]

작품을 이끄는 삼위일체 관계는 릴리스-레이-초호기 사이에서 나타난다. 릴리스의 영혼은 레이를, 하반신은 초호기를 구성하였다[미주 2]. 초호기가 먼 우주로 날아가기 전, 레이가 잠시 바라보는 동안 기동을 멈춘 것처럼 연출한 장면[EOE-26]이 있다. 이 부분의 의미는 모호한데, 릴리스 삼위일체의 붕괴와 초호기의 유일신화를 암시하는 것으로 추측된다. 직전 장면에서 거대 릴리스-아담 융합체는 그로테스크한 최후를 맞이하기 시작하면서 열두 개의 날개가 사라졌다. 이제 새로 열두 개의 날개가 돋아난 것은 초호기였다. 초호기는 롱기누스의 창을 입 밖으로 내보내고 이를 무한(∞) 형태로 봉인하였다. 아담과 릴리스까지 제거된 가운데 초호기가 유일신이 되었다. 초호기를 바라보는 레이의 담담한 표정은 삼위일체 중 릴리스와 레이가 인간을 위하여 수행할 역할이 모두 끝나고 초호기만 남았다는 암시인 듯하다. 또는 함께 릴리스에서 나온 ‘자매’를 향한 작별인사였을 수도 있다.

릴리스와 레이를 포함한 삼위일체가 상징하는 것은 어머니이다. 앞선 글에서 『에반게리온』이 남자와 비교하였을 때 여자의 희생을 더 가혹하게 그렸음을 언급한 바 있다. 여자의 희생은 인간을 낳고 지키기 위한 어머니의 원초적 희생이다. 『에반게리온』에 등장하는 주요 여성인물 중 성(姓)이 항공모함의 이름이 아닌 경우는 이카리 유이와 아야나미 레이뿐이다[미주 3]. 유이와 레이의 공통점은 신지를 소중하게 생각하고 만인을 구하였다는 것이다. 유이는 인류를 구하겠다는 의지로 초호기를 만들고 그 안에 들어갔고, 레이는 만인의 영혼을 지구 위 LCL의 바다에 뿌려 재생의 기회를 주었다[EOE-26]. 인류보완을 파멸이 아닌 재기로 바꿀 수 있었던 것은 어머니의 힘이었다. 그 힘은 에바 초호기로 남아 불멸성을 얻었다.

사람이 되어

“(…) 성자께서 사람이 되심을 알았으니, 성자의 수난과 십자가로 부활의 영광에 이르는 은총을 저희에게 내려주소서.” (천주교 삼종기도 中)

기독교 세계관의 구성요소는 『에반게리온』 곳곳에서 변용되었다. 레이를 삼위일체의 한 축으로 본다면, 위에 인용한 기도문과 그녀의 삶이 거의 일치한다. 레이는 사람이 되었고, 죽음이라는 최후의 수난으로 인류에게 부활과 진보의 가능성을 열어두었다. 하지만 탄생 부분은 극적으로 뒤틀렸다. 기독교에서 예수의 탄생은 성령을 통한 잉태로 설명된다. 여기에서는 신이라고 하더라도 임신과 출산을 통하여 세상에 나온다는 이해가 확인된다. 그런데 레이는 임신과 출산이라는 과정까지도 배제된 채 태어난 존재이다. 그래서일까, 초반부에는 사람냄새가 없었다. 인간을 창조한 릴리스와 인간 유이의 유전자를 받은 레이에게 말이다.

어멋 심쿵 [TVA-15]

레이에게 사람냄새가 풍긴 것은 이카리 부자, 특히 아들 신지 때문이었다. 여러 이유로 레이는 많은 사람들과 관계를 맺지 않았지만, 신지와 점점 가까워지던 둘째 레이 시절에 다양한 감정의 발달을 경험하였다[TVA-06·15·17·23]. 겐도는 레이를 사용하겠다는 목적이 명백하였던 반면, 신지는 그와 같은 목적을 염두에 두고 있지 않았다. 기계와 같았던 둘째 레이의 감정선은 풍부해졌다. 그리고 아담과 금지된 융합을 통하여 신이라는, 오래 전 예정된 위치로 돌아간 레이는 두려움에 휩싸여 비명을 지르는 신지에게 응답하였다[EOE-26]. 사람으로서 사랑한 사람을 구하기 위하여, 레이는 이번에는 정말로 돌아올 수 없는 먼 길을 떠났다.

레이는 복제인간으로 만들어져 한 사람의 기계인형으로 살다가, 감정을 고스란히 느끼고 그에 따라 행동하는 인간이 되었다. 그녀의 궤도는 타인을 향한 공감을 결여한 야심가 겐도를 벗어나서, 때때로 현실 앞에 좌절하지만 타인과 관계 속에서 어떤 상처도 오가게 하지 않으려고 애쓰는 착한 사람 신지에게 기울었다. 레이의 결정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존재는, 상처받고 싶지 않다는 것과 사랑받고 싶다는 것 외의 욕심을 보이지 않는 소년 신지였다. 인간이 된 신에게 손을 내밀었던 한 인간, 그의 손을 잡아준 것은 다시 신이 된 인간이었다. EOE의 결말은 소년소녀의 마음이 인류를 구원하였다고 하는, 의외로 소년만화다운 서사를 포함한다.

(下에서 계속)

[미주 1] 롱기누스의 창은 로마 병사가 십자가형으로 죽은 예수의 옆구리를 찌를 때 사용한 창이다. 『에반게리온』에서는 아담과 릴리스에게 하나씩 있었다고 설정되었는데, 네르프가 릴리스를 찔러놓은 롱기누스의 창은 겐도와 후유츠키가 함께 남극에 갔을 때[TVA-12] 입수한 것으로 보인다. 다만 롱기누스의 창으로 찌르기 전에 릴리스의 하반신이 성장하는 것을 어떻게 억제하였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에반게리온』에 등장하는 롱기누스의 창과 관련된 정보는 영어권 위키위키 참조[EvaWiki].

[미주 2] 에바 초호기가 릴리스의 하반신을 떼어 만들었다는 것은 비디오판에서 확인되는 사실이다[루리웹_엄디저트]. 이 사실을 명시한 장면은 다른 곳에서 확인되지 않는다.

[미주 3] 성명이 밝혀진 여성 중 호라키 히카리(2학년 A반 반장)가 또 다른 예외이지만, 큰 비중을 차지하지 않는 조연급이라 제외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