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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카리 신지의 여자들 (4) 아야나미 레이 下 EVA



에반게리온 감상 기획연재 4
이카리 신지의 여자들 (4) 아야나미 레이 下


※ 이 글은 『신세기 에반게리온』 TV판(1995~1996), 『엔드 오브 에반게리온』(1997)으로 구성된 에반게리온 구판의 감상이다. TV판은 수정본(리뉴얼)을 따른다.

※ TV판은 TVA로, 『엔드 오브 에반게리온』은 EOE로 축약한다. TV판의 경우 [TVA-00]로, 『엔드 오브 에반게리온』의 경우 [EOE-00]으로 장면 출처를 표시한다.

※ 글에 작품의 내용이 대량 누설된다. 따라서 스포일러 피해를 입고 싶지 않은 독자에게는 일독을 권장하지 않는다.


여자들의 적

무표정소녀 캐릭터의 원형이라고 할 수 있는 레이는 그 신비감 때문인지 사람들과 친하게 지낸다는 묘사가 거의 나오지 않는다. 사적 감정이 개입된 발언이겠지만, 레이가 사람들과 붙어있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아스카의 평판[TVA-12]은 일리 있는 지적이었다. 레이와 사람들 사이의 거리감이 두드러지는 것은 특히 여자들 사이의 관계이다. 레이는 겐도와 신지라는 두 남자와 중요한 관계에 있었고, 그 두 남자를 각각 원하는 리츠코와 아스카라는 두 여자와 갈등하였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리츠코의 어머니 나오코까지 포함해서 세 여자이다. 우연히 토우지와 대화하고 있는 장면을 본 히카리에게도 경계심을 살 정도였으니[TVA-18]. 이 정도면 레이의 질투유발력은 타고난 수준이다.

아카기 모녀는 레이의 정체를 아는 사람들이었다. 리츠코는 정확하게 레이의 정체를 알고 있었기 때문에 겐도에게 배신감을 느낀 직후 레이를 구성하는 부품들을 파괴하는 선택을 하였다[TVA-23]. 나오코는 첫째 레이의 목을 조르면서 “너는 죽어도 대신할 것이 있다”는 말을 하였는데[TVA-21], 그녀가 레이의 정체를 어디까지 알고 있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하지만 나오코가 유이를 떠오르게 하는 외모와 겐도의 모호한 소개를 통해서 레이가 최소한 의문스러운 존재라는 사실을 어느 정도 간파하였을 것으로 추측해본다. 아카기 모녀는 겐도라는 한 남자를 두고 인간도 아닌 것에게 졌다는 비참한 기분을 7년의 시간차를 두고 공유하였다.

레이와 아스카 사이의 갈등은 매우 유명하다. 갈등을 상징하는 것은 두 사람 사이의 호칭이다. 두 사람은 서로 이름을 불러준 적이 없다. 아스카가 레이의 이름을 부른 것은 딱 한 번이었고, 그나마도 레이가 있을 때가 아니라 신지와 대화하고 있을 때였다[TVA-09]. 얼마 지나지 않아서 아스카는 레이를 퍼스트[TVA-10], 우등생[TVA-11]으로 부르기 시작하였다. 레이는 애초에 사람들과 잘 어울리지 않고 이름으로 부르는 경우도 없었지만, 자주 협업한 동료 아스카를 ‘2호기의 파일럿’으로 불렀다[TVA-14]. 물론 둘 사이에서 가장 자주 쓰이고 상호 존중을 거의 배제한 호칭은, ‘너’일 것이다. 레이와 아스카 사이의 거리감 또는 갈등은 쌍방이 느끼는 것이었다.

레이가 아카기 모녀, 아스카와 갈등한 것은 이카리 부자가 그녀들을 대할 때와 레이를 대할 때가 다르다는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다. 겐도에게 나오코는 “당신은 여전히 유이 씨를 생각하고 있다”고 하였고[TVA-21], 리츠코는 “당신에게 안겨도 기쁘지 않았다”고 하였다[TVA-24]. 그런 둘은 겐도에게 특별한 애정을 받는 듯한 레이를 보면서 질투할 수밖에 없었다. 아스카는 전철 플랫폼에서 신지가 레이와 대화하는 모습을 보며, 정신공격을 당할 때 자신에게 관심을 보이지 않는 신지를 떠올리며 원망을 드러냈다[TVA-22]. 아스카의 경우는 같은 에바 조종사이면서 더 우수한 성적을 내고 있는 레이를 향한 경쟁심리가 더해졌다.

레이를 바라보는 아카기 모녀와 아스카의 공통적 불만은 자신은 사랑하는 남자와 피상적 관계에 머물고 있는 반면 레이는 그 남자와 더 깊은 유대를 지닌 것처럼 보인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레이와 그 남자 사이의 진실은 세 여자가 생각하는 것과 달랐다. 레이 자신이 마주한 진실은 가슴 아픈 것이었다. 겐도에게 레이는 목적이 아니라 수단이었다. 레이에게 신지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하나가 되고 싶은 마음이 드는 사랑이었다[TVA-23]. 그런 진실에 도달하자 레이는 쓸쓸함, 두려움이라는 감정까지 깨달았다. 아무렇지 않게 수비수로 나서거나[TVA-06·10] 자폭돌격을 감행하던[TVA-19], 가장 안정된 심리를 지녔던 에바 조종사의 극적 변화였다.

“내가 울고 있는 거야?” [TVA-23]

당신은 누구시길래

신지가 등장하기 전까지 레이에게 동경의 대상은 단 한 사람, 겐도였다. 겐도가 레이를 자신이 생각하는 서드 임팩트의 중요한 장기말로 여겼기 때문에 특별하게 대우하였음은 분명하다. 하지만 겐도가 레이를 항상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으로만 생각한 것은 아니었다. 신지가 제3신도쿄시에 등장하기 3주 전에 있었던 0호기 실험 중 사고에서 겐도는 손에 화상을 입어가며 엔트리 플러그의 문을 열어 레이를 구했다[TVA-05]. 유이의 묘비에 신지를 두고 냉정하게 돌아서던 겐도의 전용기에 타 있던 것은 레이였다[TVA-15]. 그리고 제르엘(제14사도)전에서 레이가 자폭을 시도하였을 때 겐도는 당황하였다[TVA-19].

짧게 스치지만 겐도와 레이의 관계를 보여주는 중요한 장면은 겐도가 LCL 탱크 안에 있던 레이에게 나오라고 하면서 식사를 하러 가자고 말하는 것이다. 그 모습을 바라보는 리츠코는 경계심과 질투심 가득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TVA-17]. 식사, 티타임, 음주는 『에반게리온』에서 유대 또는 갈등처럼 인간관계의 솔직하고 치열한 측면을 표출하는 장면이다. 이런 장면이 배제된 겐도가 유일하게 식사를 제안하는 대상이 레이였다. 그렇다면 리츠코의 시선을 이해할 만하다. 리츠코는 친구 미사토와 함께 있을 때만 위에 언급한 종류의 ‘먹방’을 하였다[TVA-05·11·15·21·22]. 겐도와 밀회하면서 그만한 교류가 이루어졌을 가능성은 크지 않다.

겐도를 바라보는 레이의 마음은 점점 달라졌다. 한때 겐도는 레이에게 소중한 사람이었다. 무표정소녀 레이가 이례적으로 감정을 드러낸 것이 처음에는 겐도와 관련된 일이었다. 뒤에서 욕하고 있는 신지의 뺨을 때릴 때 그녀의 표정은 노기를 띠고 있었다[TVA-05]. 그런데 지혜의 씨앗을 지닌 릴리스(리리스)의 영혼이 깃들었기 때문일까? 극에서 꽤 이른 시기에 아스카가 이카리 사령관이 레이를 편애한다고 말하자, 레이는 자신이 편애받고 있지 않다고 대답하였다[TVA-11]. 아스카의 생각은 특별한 것도 아니었다. 신지는 겐도를 어떻게 대할지 레이에게 물어보았고[TVA-15], 후유츠키조차 겐도가 레이에게 집착한다고 여겼다[TVA-14]. 그러나 인류보완이 실현될 때 레이의 선택은 오래 전부터 겐도의 진심을 간파한 것에서 비롯되었다.

극 중반부터 겐도를 향한 레이의 진심은 의문과 부정이었다. 레이는 겐도가 어떤 사람이냐고 묻는 신지에게 “모르겠다”고 대답하였고[TVA-15], 겐도에게 버려질 것임을 알고 인류보완의 날을 두려워하였다[TVA-25]. 물론 레이가 겐도를 소중한 존재로 받아들였다는 주장이 있을 수 있다. 둘째 레이가 아르미사엘(제16사도)에게 자폭하며 사망할 때 마지막으로 본 것이 근심 어린 표정을 한 겐도의 환영이었다는 점[TVA-23]을 보면 그렇다. 하지만 이 장면의 앞에서 신지와 하나가 되려고 하던 직전 장면, 뒤에서 셋째 레이가 집에 들어오자마자 겐도의 안경을 부러뜨리려고 하는 장면을 본다면 정합성이 떨어진다고 판단된다. 레이가 아르미사엘에게 자폭한 것은 겐도의 계산 안에 있었던 것 같다. 제르엘에게 수행한 자폭과 달리 겐도가 특별한 반응을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셋째 레이는 그런 겐도의 심산을 알아챈 것 같다.

첫째부터 셋째까지 모든 레이는 수많은 인간이 거짓으로 자신을 가리는 『에반게리온』에서 거의 유일하게 거짓말하지 않는 인물이었다. 그녀는 유이가 있는 곳으로 데려가달라며 아담과 릴리스의 금지된 융합을 시도하는 겐도에게 “예.”라고 대답하지 않았다[EOE-25·26]. 평소의 레이와 매우 다른 모습이었다. 그렇게 레이는 사람들을 쓰다가 버리며 자신의 목적을 향해서 달려갔던 겐도를 버렸다. 인형이 아니라는 레이의 말[TVA-22, EOE-26]은 때로 사람들이 질투하기까지 하는 ‘소중한 장기말’의 삶이 행복하지 않았다는 고백이자 독립선언이었다. 이제 그녀가 찾아간 것은 장기말의 주인이 아니라 자신의 마음 속에 있는 사람이었다.

최후의 악수 (EOE-26)

사람의 마음, 사랑의 마음

신의 영혼과 인간의 유전자가 결합되어 만들어진 레이는 인간이 된 신이다. 신이었던 인간은 특별한 존재이지만 가장 보통의 존재이기도 하였다. 감정에 초연한 것처럼 보였던 레이에게도 감정이 깃들었고, 그 감정으로 마침내 다른 사람을 걱정할 줄도, 눈물 흘릴 줄도 알게 되었다. 마침내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을 지키겠다고 자폭하여 산화하는 결정까지 하였다[TVA-23]. 여기에 초점을 맞춘다면 레이의 사랑은 목숨까지 거는 극단적 사랑이다. 나체의 형상으로 초호기를 감싸려고 하는 모습은 EOE에서도 재현된다[EOE-26]. 그런데 두 상황 모두에서 신지는 공포감에 사로잡혔다. 여기에 초점을 맞춘다면 레이의 사랑은 끝까지 받아들여지지 않는 짝사랑이다.

어쩌다 레이는 이런 사랑에 빠지게 되었을까? 아마, 첫사랑이었을 것이다. 신지가 엔트리 플러그의 문을 억지로 열어서 레이를 구하고 울었던 이후[TVA-06], 레이는 특별히 이해관계를 의식하지 않은 그의 호의에 마음이 기울었던 것 같다. 소녀는 소년 앞에서 부끄러움에 얼굴이 빨개졌고[TVA-15·17], 소년의 안위를 걱정하여 후퇴명령 앞에 잠시 망설였으며[TVA-16], “네가 신경 쓰는 건 신지”라는 말에 수긍하게 되었다[TVA-18]. 겐도에게 하지 않았던 “고마워.”라는 말을 신지에게 처음 하였다[TVA-17]. 서투른 감정이었기에 짝사랑에 머물렀고, 그나마도 실체를 알지는 못하였을 것이다. 레이는 이성을 남기고 감성을 격리한 존재였다. 따라서 차디찬 이성의 영역에 있던 겐도를 판단하기는 쉬웠지만, 신지는 감성의 영역에 있었기 때문에 판단하기가 어려웠을 것이다.

사랑에 둔감한 사춘기 초식남 신지는 레이의 감정을 알아채지 못한 것 같다. 하지만 레이와 사이에서 깊은 관계가 형성된 것은 분명하다. 차원을 넘나드는 레이의 존재 양식을 감안하면, 신지의 의식 속에서 레이와 나눈 대화를 레이도 알고 있었으리라는 추측을 할 만하다. 레이의 정체를 알기 전까지 신지는 한동안 레이에게 의지하였다[TVA-15·22]. 그런데 이와 별개로 신지는 아스카에게 관계 초반부에서 보였던 약간의 적극성과 달리 레이에게는 계속 거리를 두는 편이었다. 신지는 레이를 아야나미로 부르기 시작한 이후[TVA-05] 호칭을 바꾸지 않았다. 레이가 신지를 부르는 호칭도 이카리 군으로 고정되었다. 둘 사이는 그렇게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였다. 이는 신지와 하나가 되고 싶은 레이의 내재적 충동과 무관하게 지속되는 현실이었다.

레이의 사랑법은 대가를 바라지 않고 지켜주는 것이었다. 아스카는 육탄공세로, 카오루는 “좋아한다”는 한 마디로 신지에게 자신의 사랑을 표현하였다. 하지만 레이는 아스카나 카오루가 아니었다. 그녀는 연인이나 친구로만 규정하기 어려운 존재이다. 신, 어머니, 남매, 연인이 겹친 그녀는 말없이 신지를 지켰다. 레이는 자신이 신지의 옆을 차지할 수 없기에 소유욕을 철저히 억눌렀다. 그녀가 카오루처럼 자신이 무(無)로 돌아가는 것이 곧 해방임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TVA-25]. 신지 옆에 오래 남을 수 없던 그녀의 선택은 역설적이게도 그녀와 지독하게 대립하던 아스카였다[EOE-26]. 죽어야만 하는 신의 운명을 안고 있던 레이는 사람과 사람을 맺어주면서 자신의 역할을 마무리하였다.

레이는 사람의 마음으로 사람을 사랑하였다. 그런 마음은 신이 된 순간까지 이어졌다. 신지의 공포에 응답하여 올라간 레이는 신지가 인류를 구하는 선택을 하도록 이끌어주었다[EOE-26]. 아스카의 사랑을 비극적 사랑으로 꼽는 이들이 많지만, 레이의 사랑도 그에 못지않다. 보통 연인의 언행으로 사랑을 표현하지 못한 그녀의 사랑법은 철저한 희생이었다. LCL의 바다에서 신지가 건넨 “고마워.”라는 말, 최후의 악수, 잠깐의 무릎베개를 끝으로 금지된 릴리스-아담 결합체 레이는 죽음을 맞이하였다. 죽음을 맞이하는 레이의 표정은 그로테스크할지언정, 슬프지는 않았다. 사람을 사랑하는 마음은 신의 것이든 사람의 것이든, 모두 희망을 품어야 하는 이유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