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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카리 신지의 여자들 (5) 소류 아스카 랑그레이 EVA



에반게리온 감상 기획연재 5
이카리 신지의 여자들 (5) 소류 아스카 랑그레이


※ 이 글은 『신세기 에반게리온』 TV판(1995~1996), 『엔드 오브 에반게리온』(1997)으로 구성된 에반게리온 구판의 감상이다. TV판은 수정본(리뉴얼)을 따른다.

※ TV판은 TVA로, 『엔드 오브 에반게리온』은 EOE로 축약한다. TV판의 경우 [TVA-00]로, 『엔드 오브 에반게리온』의 경우 [EOE-00]으로 장면 출처를 표시한다.

※ 글에 작품의 내용이 대량 누설된다. 따라서 스포일러 피해를 입고 싶지 않은 독자에게는 일독을 권장하지 않는다.


대인간 결전병기

에바는 대사도 범용 인간형 결전병기이다. 하지만 인간의 가장 강력한 적은 인간이다[TVA-12, EOE-25]. 네르프가 끝내 이기지 못한 단 하나의 사도가 릴림(리린, 제18사도), 곧 인간이었다. 아스카는 그런 이치에 충실한 존재였다. 대사도 결전병기 에바 2호기의 조종사, 소류 아스카 랑그레이는 대인간 결전병기이다. 아스카와 갈등하고 인류보완 직전 단계까지도 그것이 해소되지 않았던 면면은 레이, 미사토, 신지, 하나 같이 주인공들이다. 반면 대사도 결전병기의 조종사로서 아스카의 전적은 초라하다. 합동작전[TVA-08·09·11·12]을 제외하면 아스카는 사도와 단독 교전했을 때 한 번을 제외하고[TVA-10] 전패했다[TVA-18·19·22]. 양산형 에바를 상대로 분투했지만 결말은 참혹했다[EOE-25].

대인간 결전병기라는 아스카의 특성은 에바 2호기와 크게 다르지 않다. 자세히 살펴보면 2호기는 사도가 아니라 인간을 공격하는 장면이 많이 나온다. 그럴 의도는 아니었지만 2호기는 첫 등장부터 유엔군 함대를 파손하고 다녔다[TVA-08]. 카오루가 조종할 때에는 초호기와 맹렬하게 싸웠다[TVA-24]. 양산형 에바와 교전하기 전 2호기는 AT필드를 방사하며 전략자위대를 완파했다. 결국 2호기는 최후의 폭주로 그 안에 깃든 영혼의 딸 아스카마저 파괴하고 말았다[EOE-25]. 전인류 구원을 뚜렷하게 의식하고 죽을 운명을 알고 있던 자원자가 흡수된 초호기와 달리, 0호기는 시험기동에서 종종 폭주했고 2호기는 전투에서 인간에게 타격을 입혔다. (둘째 레이가 0호기로 자폭했을 때 발생한 대폭발이 제3신도쿄시를 대파했다는 사실은 잠시 제쳐두자.) 2호기의 전과는 아스카의 성격과 운명을 상징한다.

아스카는 에바를 타고 사도와 싸우는 이유를 두 가지로 설명했다. 하나는 정체불명의 적이 오면 치워내야 한다는 것이었고[TVA-11], 다른 하나는 자신의 존재를 세상에 보인다는 것이었다[TVA-10]. 후자는 레이의 이유[TVA-06]와 비슷하게 해석될 수 있지만, 그 말을 하는 그녀의 모습은 서글픈 기색으로 고민의 흔적을 드러낸 레이와 사뭇 달랐다. 아스카는 에바를 타는 것을 매우 당연하게 받아들일 뿐만 아니라, 자신의 존재를 부각할 기회로 생각했다. 결국 인간군상 가운데 우뚝 서고 싶은 것이 아스카의 욕망이었다. 아스카는 미처 알지 못했고 알았다고 하더라도 동의하지 않았겠지만, 그녀의 주적은 사도가 아니라 인간이었다.

왜 아스카는 대인간 결전병기가 되었을까? 아스카의 불행한 과거[TVA-22]는 매우 잘 알려졌으니 자세히 다루지 않겠지만, 그녀 이상의 불행한 과거를 찾기 힘들 지경이니 이해할 만하다. 하지만 또 하나 짚고 넘어갈 것은 에바 조종사 발탁 이후 그녀가 처한 환경이다. 아스카는 제3신도쿄시에 오기 전 이미 대학교육을 마쳤다[TVA-10]. 아스카는 수월성 교육을 받고 또래와 격리된 생활을 하면서 또래보다 자신이 우월하고 특별하다는 자의식을 강화했을 것이다. 그러니 중학생 소년들의 팬레터가 우스웠고[TVA-09], 또한 카지에게 자신이 어른이라고 주장할 수 있었다[TVA-10·22]. 여러 장면에서 밝혀진 것처럼 아스카는 또래 소녀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단지 아스카가 “남들과 똑같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을 뿐이다.

제3신도쿄시 제1중학교 전학 직후, 명랑쾌활한 아스카 [TVA-08]

카지 씨는 사랑일까

카지 료지는 『에반게리온』에서 보기 드물게 상식적 세계관을 견지하는 인물이다. 진정한 사랑이 미사토 한 사람이어서 그렇기도 했지만, 카지는 아스카의 적극적 구애를 매번 거절했다. 그래도 일본에서 새로운 남자친구가 많이 생길 것이라고 말해주며 거절한 것을 보면[TVA-22], 카지는 나름대로 아스카를 배려하는 편이었다. 에바를 조종하는 ‘제3의 아해’ 신지를 처음 대면한 아스카의 반응을 확인하면서[TVA-08], 카지는 확실히 전략을 세운 모양이었다. 이스라펠(제7사도)전의 대책으로 신지와 아스카를 미사토의 집에서 동거하게 만든 것[TVA-09]은 아스카에게 또래 친구를 만들어주는 것이자 장기적 관점이 반영된 선택으로 보인다. 카지는 이를 목전의 강적 이스라펠도 잡고 아스카의 방황도 끝낼 수 있는 전략으로 생각했던 것 같다.

문제는 ‘정상적’ 아버지를 거의 경험하지 못한 아스카가 카지가 자신에게 갖는 의미를 혼동했다는 것이다. 또래 소년을 만날 기회가 거의 없던 상황에서 성적(性的)으로 조숙했던 아스카가 혈연관계가 없는 건장한 청년 카지를 사모했을 가능성은 있다. 그런데 신지가 눈에 들어온 이후에도 아스카는 카지를 강하게 의식했다[TVA-10·15·18·22]. 이 상황을 설명할 두 가지 방법이 떠오른다. 하나는 신지에게 남성적 질투심을 유발하기 위한 행동으로 보는 것이다. 하지만 TVA-15를 제외하면 그렇게 보기는 어렵다. 다른 하나는 “아빠랑 결혼하겠다”거나 “아빠 닮은 남자랑 결혼하겠다”는 유소년기 여자의 심리에 따른 행동으로 보는 것이다. 특히 ‘정상적’ 아버지의 보호를 거의 받지 못한 아스카에게 카지의 역할이 ‘정상적’ 아버지에게 기대할 수 있는 것에 가까웠기 때문에 의존도가 더 높았을 것이다. 그리고 신지에게도 카지 같은 버팀목이 되어주기를 기대했을 것이다.

카지와 미사토가 다시 가까워지는 것을 보면서 아스카가 미사토에게 반발심을 키워간 것[TVA-15·16]은 연적(戀敵)을 대하는 심리였을 수 있다. 하지만 아스카가 미처 생각하지 못했을 의미는 미사토가 자신의 ‘아빠’를 갑자기 낚아챈 ‘새엄마’ 같은 존재라는 것이다. 이미 미사토의 사랑을 받고 있고 카지도 예사롭지 않게 대하는 대상인 신지는 아스카에게 자신이 받아야 할 ‘아빠’의 사랑을 가로채는 ‘남매’였을 것이다. 아라엘(제15사도)에게 정신공격을 당할 때 아스카는 카지를 애타게 찾았는데 그 자리에는 신지가 있었고, 아스카는 분노했다. 정신공격이 끝난 뒤에도 아스카는 “카지 씨, 나 더럽혀졌어요….”라고 말했다[TVA-22]. 해석은 각자의 판단에 달렸지만, 나는 아스카가 카지를 ‘보호자’로 인식한 가장 확실한 증거가 TVA-22의 장면들이라고 생각한다.

카지의 사망 사실을 알고 난 뒤 아스카가 자살을 시도한 것[TVA-24]은 존중받을 가치를 잃은 것처럼 보이는 자신의 삶을 그래도 지켜줄 것 같은 실질적 아버지를 잃었다는 상실감에 따른 것으로 이해된다. 신지가 폭발하기 전까지 네르프 관계자들이 모두 아스카에게 사실을 발설하지 않은 것은 아스카에게 보호자 카지의 영향이 컸음을 알았기 때문일 것이다. 굴절된 심리의 소유자 아스카는 명확히 인지하지도 표현하지도 못했지만, 그녀는 혼란 속에서도 유사가족 카지를 중요하게 받아들였다. 하지만 ‘아빠’가 ‘새엄마’와 가까워지던 상황은 아스카의 정신에 악영향을 끼쳤다. 아스카는 TVA-15부터 무너지면서 심리의 저층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여기에는 ‘아빠’의 자리를 대신할 남자의 부재도 중요하게 작용했다. 바로 신지의 문제이다.

카지는 신지와 아스카가 다정하게 지내기를 원했다. [TVA-18]

바보들의 대화

‘바보 신지’(バカシンジ)는 바보가 아니었다. 신지는 아스카와 만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시점부터 아스카에게 에로스(eros)적 욕망을 보였다. 예를 들면 자신의 옆에 와서 자고 있는 아스카에게 키스하려고 한다든지[TVA-09], 비키니를 입고 달라붙는 아스카 때문에 얼굴이 화끈해지고 온천에서 미사토가 아스카에게 장난 치는 소리를 들으면서 남자의 생리현상을 겪는다든지[TVA-10], 성애(性愛)에 눈 뜨기 시작한 사춘기 소년다운 행동이다. 의식을 잃은 아스카를 향한 신지의 자위행위[EOE-25]는 심리의 최저점을 찍은 상태에서도 아스카를 향한 에로스적 욕망이 남았음을 보여준다. 그런데 강한 애정공세를 편 아스카에게 신지는 합당한 반응을 하지 않았다. 아스카가 말한 것처럼 바보 신지는 그토록 아스카의 마음을 몰라주는 바보였을까? 맞다, 신지는 타인의 공포를 지독하게 의식하는 고슴도치였기 때문에 아스카의 마음을 다독여주지 못했다. 하지만 신지뿐만 아니라 아스카도 바보였다.

아스카의 화법을 압축하면 과장과 굴절이다. 심리를 있는 그대로 말하지 않고 비틀어서 내보인다. 정신공격을 당한 뒤 약해질 대로 약해진 모습을 호라키 히카리에게 보여준 경우[TVA-23]를 제외하면 이런 면모는 거의 변하지 않았다. 이런 화법의 기저에는 혼자 살 수 있다는 마음[TVA-22], 약해보이고 싶지 않은 마음이 깔려있다. 하지만 아스카는 『에반게리온』의 누구보다도 함께 할 사람이 필요한 존재였다. 대사도전에서 신지와 레이가 없는 아스카는 아무 성과도 내지 못했다. 유일하게 단독으로 사도를 격파했던 산달폰(제8사도)전에서도 신지가 초호기로 무리하게 구해주지 않았다면 아스카는 죽었을 것이다[TVA-10]. 아스카는 이런 사실을 인정할 수 없었다. 혼자 살 수 있다고 주장하면서도 외로웠던 일면이 정신공격에서 드러났지만 아스카는 다시 한 번 자신을 부정했다[TVA-22].

바보 신지를 만든 것은 솔직할 줄 몰랐던 아스카였다. 자신의 가족 이야기를 조금 털어낸 뒤에도 공연히 민감하게 반응했던 아스카[TVA-22]의 본심은 자신을 이해해주지 못하는 신지에게 화가 나 있었고, 신지는 번번이 미안하다고 했지만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는 아스카에게 악감정을 쌓고 있었다[EOE-26]. 아스카의 굴절된 화법은 신지를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첫 유혹에서 아스카는 굳이 『성경』에 등장하는 ‘예리코(제리코)의 벽’이라는 비유를 선택했다. 신지가 당연히 알 것이라는 전제가 있었을 수 있지만, 유혹이 꼭 친절할 필요가 없다지만 이 정도 불친절은 심각해보인다. 아스카의 본심은 비몽사몽간에 신지 옆에 누웠을 때 나왔다. 자신은 ‘엄마’를 찾는 평범한 소녀이고, 옆을 지켜줄 사람이 필요하다는 것 말이다[TVA-09]. “심심한데 뽀뽀나 해 볼까?”라는 말이 생각나는 둘의 키스가 해프닝으로 끝난 것도 당연했다[TVA-15]. 아스카가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종잡을 수 없던 신지 입장에서 그런 키스를 받으면 적극적으로 반응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아무 말도 해 주지 않는 아스카를 향한 신지의 울분은 정당한 측면이 있었다. 아스카는 성적 접촉으로 자신의 사랑을 다 표현했다고 생각했고, 마음을 알아주지 않는 신지를 미워했다. 하지만 신지는 성적 접촉으로 심적 고뇌를 모두 해결하려고 하는 상황을 일관되게 거절했다[TVA-23]. 신지가 자아뿐만 아니라 현실에서 레이에게 조언을 구하거나[TVA-15] 즐겁게 대화한 것[TVA-22]은 레이가 그만큼 깊은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상대라는 판단 때문이었다. 신지에게 중요한 것은 많은 말이나 몸의 대화가 아니었다. 성장이 진행되는 시기였기 때문에 신지가 상대에게 의지하는 경향이 컸지만, 인류보완 단계의 발화를 보면 아스카가 흉금을 털어놓기를 기대한 정황은 분명히 확인된다[EOE-26]. 둘 사이는 그렇게 엇갈렸다. 자신은 충분히 표현했다고 생각하는 여자와 그녀의 솔직한 말을 들어본 적 없는 남자의 비극적 충돌이었다.

그래서 아스카의 마지막 전투는 더욱 슬펐다. 이전과 다를 바 없이 아스카는 “바보 신지따위 기대할 수 없다”고 외쳤다[EOE-25]. 하지만 그런 굴절된 외침은 의욕을 상실한 신지를 깨울 수 없었다. 차라리 신지의 이름을 외치면서 “살려달라”(たすける)고 했다면 이야기가 달라지지 않았을까, 가끔 생각해본다. 아스카가 “살려달라”는 말을 언제 했는지 기억하는가? 알몸으로 모의체에 올라탄 채로 호수에 떠 있었을 때[TVA-12], 카지의 응답을 받기 위해서 메시지로 거짓말을 했을 때[TVA-15]였다. 정작 에바 2호기를 조종하면서 생사가 걸린 위기를 맞이했을 때 아스카는 “살려달라”고 외치지 않았다. 오히려 타인 때문에 살아난 뒤 굴욕감을 드러내곤 했다[TVA-20·22]. 결국 가장 ‘바보 신지’의 도움이 필요했던 최후에, ‘바보 아스카’는 어떤 도움도 받지 못하고 죽었다.

신지와 아스카 둘에게 가장 필요했던 것, 쓰담쓰담 [EOE-26]

완성이 아닌 성장을 말하는 결말

신지는 인류보완에서 인간의 불완전성을 인정한 가운데 현실의 존재를 긍정하기로 마음 먹고 LCL의 바다 밖으로 나왔다. 그의 옆에 있던 여자들 중 살아난 것은 아스카뿐이다. 아스카는 LCL화 이전 사망 당시 중상을 입은 눈에 안대를 쓰고 오른팔에 붕대를 감았다. 신지는 인류보완 단계에서 그랬던 것처럼 아스카의 목을 졸랐다. 인류보완은 인간의 완성이 아니었다. 불완전한 현실의 인간을 부정하며 도피하는 죽음의 세계 또는 타인을 향한 이해를 진전시킬 수 있다는 믿음을 얻는 성장의 공간이었다. 성장은 완성과 동의어가 아니다. 그래서 『에반게리온』의 결말은 숙제 같다.

소년은 언젠가 어머니의 품을 떠나야 한다. 유이, 레이, 미사토는 신지의 곁에 더 이상 없다. 이제 신지는 다른 사람이 기댈 수 있는 버팀목이 되는 법을 배워야 한다. 굳이 중반부까지 묘사된 커플링이 아니더라도 신지가 아스카와 이어진 것은 정합적 결말이다. 갈 길은 멀다. 인류보완 단계에서 갈등이 표출된 이후 신지가 마음 속에서 아직 아스카와 화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길이 가지 못할 길은 아니다. 아스카가 신지의 뺨을 쓰다듬고, 솔직하고 차분하게 자기 기분을 드러냈기 때문이다. 완전하게 타인을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 한계를 인정한 가운데 인간은 타인의 틈에 끼어 살아가야 한다. 그래도 조금씩 나아질 수 있다는 믿음은 중요하고, 아스카는 그 믿음이 유효하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유년기의 불행한 과거를 제외하면 거의 공통점이 없는 신지와 아스카가 만나서 서로 호감을 품는다는 것은 어찌 보면 기적이다. 아스카는 한 번의 연습도 없이 신지와 댄스 호흡을 맞췄던 레이와 달리 신지에게 맞추려고 많이 노력해야 했다. 그 점은 신지도 마찬가지였다. 두 사람의 노력이 빛을 발했을 때, 초호기와 2호기는 아름답게 사도를 격파했다[TVA-09]. (방전 후 자세 때문에 리츠코에게 “꼴 사납다”는 평가를 받은 것은 잠시 잊자.) 신지와 아스카는 치열하게 갈등하던 끝에 서로 알아가고 사랑에 빠질 가능성을 만들었다. 서드 임팩트 이후의 아담과 이브를 통하여 『에반게리온』은 인간의 가능성을 향한 기대를 남겨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