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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카리 신지의 여자들 (6·끝) 이카리 유이 EVA



에반게리온 감상 기획연재 6
이카리 신지의 여자들 (6·끝) 이카리 유이


※ 이 글은 『신세기 에반게리온』 TV판(1995~1996), 『엔드 오브 에반게리온』(1997)으로 구성된 에반게리온 구판의 감상이다. TV판은 수정본(리뉴얼)을 따른다.

※ TV판은 TVA로, 『엔드 오브 에반게리온』은 EOE로 축약한다. TV판의 경우 [TVA-00]로, 『엔드 오브 에반게리온』의 경우 [EOE-00]으로 장면 출처를 표시한다.

※ 글에 작품의 내용이 대량 누설된다. 따라서 스포일러 피해를 입고 싶지 않은 독자에게는 일독을 권장하지 않는다.


거대한 도박

이카리 신지의 어머니, 유이는 속을 알기 어려운 사람이다. 『신세기 에반게리온』의 상황은 대부분 유이가 짰던 판 위에서 돌아가고 있는데, 정작 유이가 처음 모습을 드러낸 것은 극의 분위기가 어두워지는 시점이었고[TVA-16] 그나마도 자주 등장하지 않아서 EOE를 보지 않으면 그녀의 구상을 도무지 알 수 없다. 그런데 그녀의 구상을 알아도 평가를 어떻게 해야 할지 난감하다. 그녀가 인간의 힘으로 신(神)을 만드는 E계획의 핵심인사이자 명백하게 서드 임팩트를 전제한 가운데 판을 짰기 때문이다. 이는 미사토가 서드 임팩트를 막는 방향으로 행동한 것과 대비했을 때[EOE-25] 유이를 긍정 일변도로 평가할 수 없게 만드는 부분이다.

에바는 세계를 구원하거나 파괴할 수 있는 괴물이다. 결과는 인간의 손에 달렸다. 젤레(제레)의 구성원이었던 유이는 서드 임팩트를 피할 수 없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미주 1]. 그래서 그녀는 에바 초호기에 자진 흡수되었고[TVA-21]. 그때부터 이미 젤레의 ‘인류자살계획’은 상당한 차질을 빚게 되었다. 즉, 대단한 권능을 지녔지만 가치 중립적 상태에 있는 괴물인 에바를 선의지로 이끄는 것이 유이의 계획이었다. 결과는 성공이었지만 이미 세계의 파멸은 피할 수 없었다. 세컨드 임팩트가 생태환경에 끼친 영향을 감안했을 때, 서드 임팩트 역시 엄청난 재앙을 불러왔다고 짐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유이의 판단은 이랬을 것이다. 첫째, 서드 임팩트를 완전 봉쇄하는 최선은 이룰 수 없다. 둘째, 젤레의 ‘인류자살계획’이라는 최악은 피해야 한다. 셋째, 서드 임팩트가 발생한다는 전제하에 에바 초호기를 신(神)으로 만들어서 인류의 피난처로 삼는 차선(차악)을 선택한다. 이 도박은 초호기의 전속 조종사가 될 아들 신지가 선하다는 믿음이 있어야만 시도될 수 있는 것이다. 전 인류의 (동의를 받은 적 없지만) 운명을 건 도박인데 한 사람의 선의지에 기대는 것은 너무 허술하지 않은가 싶지만, 인간이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최후의 희망을 때때로 연약해보이는 선의지라고 생각한다면 충분히 그럴 수 있다.

그런데 신지의 선의지를 믿는 것도 인류보완계획이 실현되었을 때라야 가능하다. 유이의 계획이 발동하려면 몇 가지 선결조건이 있었다. 첫째, 사도를 모두 격퇴한다. 둘째, 릴리스(리리스)의 분신[EOE-25]으로 이미 지혜의 씨앗을 지닌 에바 초호기가 S2기관을 얻어 생명의 씨앗까지 지녀 신적 존재로 격상된다. 셋째, 초호기와 그 조종사 신지가 인류보완 과정의 핵심 결정권을 갖는다. 어느 하나 쉬운 것이 없어보이는 도박이 성공한 것은 만화였기 때문이라고 설명하면 간단할까? 유이는 조금이라도 어그러지면 인류가 절멸할 수 있는 상황에서 어려운 선결조건이 세 개나 붙은 도박을 하고 있었다.

유이가 안고 있는 남자, 유이 옆에 서 있는 남자는 10년 동안 유이의 계획에 동원될 것이다. [EOE-26]

잔인한 사랑

서드 임팩트를 전제했다는 점에서 한계가 있지만 전 인류를 구원하려고 한 유이의 선의지는 의심할 필요가 없다. 하지만 “살아있다면 희망은 있다”는 낙관론과 달리 유이의 행동은 잔인했다. 특히 그녀를 사랑하는 사람, 그녀가 사랑하는 사람에게 유난히 그랬다. 유이와 만나면서 수렁에서 겨우 빠져나온 겐도, 이루어질 수 없는 짝사랑을 하던 후유츠키, 에바 초호기 접촉실험을 지켜보던 신지 모두에게 유이의 ‘사고사’는 큰 상처를 남겼다[TVA-21]. 이미 잘 알려진 것처럼 세 남자는 인류보완계획이 실현될 때까지 결국 유이에게 이용당한 셈이었다.

유이의 잔인한 사랑이 흥미롭게 다가오는 것은 이 또한 배우자, 보호자의 역할에 충실한 인물이 없는 『신세기 에반게리온』 특유의 상황에서 예외가 아니기 때문이다. 유이는 전 인류의 구원을 구상한다는 점에서 위인(偉人)이지만, 그 미명하에 가정을 포기하고 남은 두 남자의 관계가 최악으로 치닫는 것에 일조했다는 점에서 선인(善人)이 아닌 악인(惡人)에 가깝다. 유이는 에바 초호기의 혼으로서 신지를 위기에서 여러 번 구했지만, “이제 괜찮니?”라고 물었을 뿐이고[TVA-16, EOE-26] 친모의 부재로 성장과정이 불행했던 신지에게 어떤 사과도 하지 않았다. “신지를 위해서” 한 일이니[TVA-21] 스스로 떳떳하다고 생각했을까?

젤레의 ‘인류자살계획’이라는 거시적 문제에 직면하여 유이가 취한 행동은 자기 희생으로 상찬할 만하다. 하지만 그것으로 신지의 불행한 유소년기 같은 미시적 문제를 다 덮을 수는 없다. 설명이 불친절한 작품이라서 그랬을까, 인류보완 과정 중에 신지도 알게 될 것이라고 생각해서 그랬을까, 작중에서 유이는 신지에게 어떤 해명도 사과도 하지 않았다. 신지에게 현세의 행복을 믿게 한 상상은 평범한 가정과 학교에서 사는 삶이었다[TVA-26]. 에바 조종사로서 그는 행복하지 않았고, 초호기 안에서 어머니의 존재를 보고도 탑승에 미온적이었다[TVA-19, EOE-25]. 초호기 안에 있는 어머니는 신지의 훌륭한 보호자가 되기 어려웠다. 자기를 버리고 죽음으로써 인류를 구원하려고 한 유이는 아들에게 잔인한 운명을 선사했다.

그녀의 연결고리, 레이

육체적 생존을 포기한 유이가 현실에 그나마 영향을 줄 수 있는 수단은 자신의 유전자를 복제하여 만들어진 아야나미 레이였다. 물론 『신세기 에반게리온』의 세계관에서 영혼과 육체는 분리되며, 영혼조차 부분별 분리가 가능하다는 점에서 유이와 레이를 동격으로 놓을 수 있는지 의문을 제기할 수 있다. 하지만 사고와 행동이 영혼만의 산물은 아니다. 레이를 구성하는 유이의 유전자 또한 레이의 사고와 행동을 결정하는 요소이다. 0호기와 초호기의 퍼스널 패턴이 유사하다는 것[TVA-14]은 코어를 구성하는 영혼의 동질성을 말하는 것으로, 레이의 사고와 행동이 유이와 닮았음을 암시한다.

유이와 레이의 중요한 공통점은 “타인을 구하려고 죽을 준비가 되어있는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그녀들의 희생은 신지에게 좌절감을 초래하거나 행동을 촉구하는 것, 아니면 둘 다였다. 레이는 특히 그랬다. 처음부터 그랬지만[TVA-01] 결정적 장면은 제르엘(제15사도)전에서 2호기의 머리가 굴러떨어졌을 때도 반응하지 않던 신지를 네르프로 달려가게 만든 자폭공격이었다[TVA-19]. 또한 레이는 유이가 미처 수행하지 못한 현실 속 보호자의 역할을 해냈다. 대사도전에서 0호기가 초호기를 지킨 것은 매번 생명이 걸린 상황이었다[TVA-06·23]. 레리엘(제13사도)전 직후 침상에 있던 신지를 지켜본 것[TVA-16], 토우지의 중상[TVA-18] 이후 전투는 물론 제3신도쿄시 생활에 의욕을 상실했던 신지를 일으켜준 것[TVA-22]도 레이였다.

레이와 신지의 관계가 발전한 이후, 그녀의 행보는 유이가 보여줄 중요한 선택과 같은 성격을 지닌 것이었다. 신지의 자아 속에서 레이는 신지에게 자기 반성을 촉구하고 그의 어두운 내면을 드러냈다[TVA-19·20]. 아스카가 죽는 동안 무기력하게 아무것도 하지 않던 신지를 그대로 두었다가 결국 참상을 보게 만든 유이의 선택과 같은 것이다[EOE-25]. 결정적 합일점은 겐도의 최후였다. 레이는 겐도의 안경을 부러뜨림으로써 단절을 선언했다[TVA-23, EOE-25]. 이는 레이가 아담을 흡수한 채 신지에게 간 것, 초호기가 인류보완 중에 겐도를 LCL화하지 않고 상반신을 뜯어먹은 것과 이어진다[EOE-26]. 나는 유이가 겐도를 직접 단죄했을 것으로 추측한다[미주 2].

신지의 상상 속 평범한 가정상, 하지만 이 결말이 실현되는 일은 없었다. [TVA-26]

한 끗 차이

『신세기 에반게리온』은 선악의 구도를 이항대립이 아닌 호환으로 그려냈다. 인간은 완전하지 않은 존재이다. 불완전성을 인정하면서도 지금보다 더 나아질 수 있다는 희망을 품어야만 인간은 파멸하지 않고 생존을 지속할 수 있다. 이런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은 유이의 대사만이 아니다. 선하다고만 평가하기 어려운 그녀의 이중적 면모는 새로운 신을 만들고 인류 구원을 설계한 유이 같은 초인도 불완전한 인간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EOE-25의 부제는 “사랑은 파괴적이다.”(Love is destructive.)였다. 신지를 포함한 인류를 사랑하는 유이의 방식은 파괴적이었다. 젤레와 달리 ‘부활’을 실제 목표로 추구하고 있었지만 그 과정은 잔인했다.

선과 악은 한 끗 차이에 있다. 겐도의 직무는 사도를 격퇴하여 인류를 수호하는 ‘선행’이다. 하지만 그 과정과 방법은 ‘악행’으로 가득하다. 유이는 짧은 등장 중에도 선의지를 뚜렷하게 표방하고 신지를 통해서 인류의 완전 파멸을 막은 것으로 높게 평가받는다. 하지만 유이의 행동을 완전한 ‘선행’으로 보기는 어렵다. 인류보완 단계에서 신지의 결정이 달라졌다면 유이를 향한 평가도 달라졌을 것이다. 전 인류의 운명을 걸고 한 도박인데, 결과가 좋다고 그 위험과 한계까지 외면할 수는 없다. 『신세기 에반게리온』에서는 신조차 완벽하지 않아서 인간에게 수난을 당했다. 인류를 구원한 인간 유이도 완벽하지 않았다. 불완전한 존재들의 서사는 이카리 유이를 통해서 완성되었다. 그 의미를 놓쳐서는 안 된다.

[미주 1] 유이가 서드 임팩트를 불가피하다고 생각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유도했다고 볼 여지도 있다. 근거는 EOE에서 에바 초호기가 신지에게 취한 태도이다. 아스카가 한창 양산형 에바와 교전하고 있을 때 초호기는 움직이지 않았다. 초호기가 베어클라이트를 뚫고 신지에게 탑승하여 나가도록 한 시점은 아스카 사망 직후였다. 이미 신지가 초호기로 전투를 수행하는 것이 불가능에 가까울 때 말이다. 사도에 침식된 에바 3호기에 토우지가 탔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신지의 절규[TVA-18], 아르미사엘(제16사도)이 레이의 형상으로 초호기 침식을 시도했을 때 신지의 반응[TVA-23]을 떠올려보자. 신지가 2호기와 아스카의 참상을 보고 전투를 수행하는 것이 가능했다고 보기 어렵다. 그 장면을 본 신지는 공포감에 빠져 엄청난 비명을 질러댔고, 원본 롱기누스의 창까지 날아와서 초호기를 일단 침묵시켰다.

[미주 2] 겐도를 살해한 주체는 유이, 레이, 신지로 시각이 엇갈린다. 나는 최소한 신지는 아니라고 본다. 우선 신지는 인류보완의 결정권자이지만 LCL화에 포함되었기 때문에 초호기를 조종할 수 없었다. LCL화에 포함되지 않은 유이, LCL화에서 자유로운 형태로 보이는 레이가 아니라면 겐도를 살해할 수 없었다. 그런데 당시 초호기를 기동할 수 있는 존재는 그 안에 깃든 유이뿐이다. 영어권 위키는 EOE-26 항목에서 다음과 같이 직설적으로 유이가 겐도를 살해했다고 설명한다[EvaWiki]. “Yui turns into Evangelion Unit-01 and picks up Gendo; he asks if this is his punishment. Saying "I'm sorry, Shinji", Unit-01 bites off Gendo's head, inducting him into Pre-Instrumentality.”

덧글

  • 2016/05/01 16:11 #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2016/05/01 21:45 # 비공개

    비공개 답글입니다.
  • 2016/05/01 22:00 # 비공개

    비공개 답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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