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릴림의 말 (1) 미안하다는 말 EVA



에반게리온 감상 기획연재 7
릴림의 말 (1) 미안하다는 말


※ 이 글은 『신세기 에반게리온』 TV판(1995~1996), 『엔드 오브 에반게리온』(1997)으로 구성된 에반게리온 구판의 감상이다. TV판은 수정본(리뉴얼)을 따른다.

※ TV판은 TVA로, 『엔드 오브 에반게리온』은 EOE로 축약한다. TV판의 경우 [TVA-00]로, 『엔드 오브 에반게리온』의 경우 [EOE-00]으로 장면 출처를 표시한다.

※ 글에 작품의 내용이 대량 누설된다. 따라서 스포일러 피해를 입고 싶지 않은 독자에게는 일독을 권장하지 않는다.


릴림의 변(辯)

첫 기획 「이카리 신지의 여자들」을 마무리한 이후 새로운 기획으로 무엇을 앞세울지 고심하던 끝에, 노다공소(勞多功少)한 길이라도 에바 감상에 하나의 좋은 지표를 제공할 수 있다면 다행이라는 생각으로 선택한 것이 「릴림의 말」이다. 이 기획은 『신세기 에반게리온』에서 특정 발화에 집중하여 등장인물들을 분석해보려는 것이다. 흔히 알고 있던 사실을 재확인하는 결과가 도출될지라도, 나는 이런 방식의 정리가 의미를 지닐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릴림의 말」 기획을 여는 이번 글을 예로 들어 앞으로 사용할 방법을 소개한다. 분석 대상은 TVA-01~24, EOE-25~26이다. 총 26화에서 “미안하다” 또는 “죄송하다”로 번역될 수 있는 말이 언제, 누구 입에서, 얼마나, 어떤 의미로 나왔는지 최대한 표본을 확보한다. “미안하다” 같은 문장종결형은 물론 “미안하지만” 같은 양보형도 포함한다. 한 번 “미안하다”고 했던 상황이 회상에서 재현된 경우는 제외한다. “실례하다”는 『신세기 에반게리온』의 대화들을 살펴보면 “미안하다”와 같은 의미를 지닌다고 보기 어려워서 제외한다.

이렇게 최대한 “미안하다”의 표본을 확보하고 화자, 청자, 상황을 정리한 다음 수행하는 작업은 성격을 분류하는 것이다. 완전한 의미의 객관성 따위는 존재하지 않지만, 최대 다수의 동의를 확보하기 어려운 판단이 있을 수 있다. 하지만 그런 한계를 감수하더라도 분석은 의미가 있을 것이다. “미안하다”의 성격은 사과, 부탁, 공격으로 구분한다. 단, 세 성격 중 두 가지가 병존하는 경우가 있을 수 있다. 이런 판단이 자의적이지 않을까 염려되지만 발화 맥락을 고려한다면 용인할 수 있는 수준이라고 생각한다.

이 사진은 본문과 관계가 없을지도

미안할 줄 아는 사람들 : 미사토, 신지

26화로 전개된 TVA~EOE에서 “미안하다”로 번역되는 발화는 64회 확인된다. 에바 관련자들이 그렇게 인간미 넘치는 사람들이었던가 생각할지 모르지만, 64회라는 총수는 큰 의미가 없다. 왜냐하면 그 중 미사토가 말한 것이 24회, 신지가 말한 것이 12회로 “미안하다”라는 말이 두 주인공에게 쏠려있기 때문이다. 『신세기 에반게리온』의 두 주인공은 미안한 감정을 표현하는 것에 인색하지 않다. 미사토가 말한 “미안하다” 24회 중 사과는 17회, 부탁은 5회, 사과 또는 부탁이 공격과 혼재된 것은 2회이다. 신지가 말한 “미안하다” 12회는 공격 1회를 제외하면 모두 사과이다.

미사토의 “미안하다” 발화는 다음 특징을 지닌다. 첫째, 일부 회차에 집중됐다. TVA-01 4회, TVA-12·15 3회, TVA-18·23·24 각 2회로, “미안하다” 발화의 과반수가 5화에 걸쳐 이뤄졌다. 둘째, 시간이 지날수록 특정 인물에게 사과가 집중된다. 전반기는 신지와 함께 나오는 장면이 많았기 때문에 미사토의 사과를 주로 받은 것은 신지였다[TVA-01·02·07·12 : 6회]. 후반기는 카지[TVA-15 : 3회], 리츠코[TVA-16·20·22 : 3회], 신지[TVA-18·23 : 4회], 휴가[TVA-24, EOE-25 : 3회]로 특정 회차의 사과가 집중됐다. 셋째, 공격성 사과가 다른 사람들과 비교했을 때 온건했다. 미사토의 공격성 사과는 신지가 늦잠을 자고 식사 당번 일을 하지 않은 그녀더러 왜 노처녀인지 알겠다고 발언했을 때 나온 것[TVA-07], 카지 사망 이후 동거인들의 출입을 거절하는 글을 방문에 붙인 것[TVA-23]에서 확인된다. 뒤에 쓰겠지만 리츠코와 아스카의 공격성 사과는 미사토보다 수위가 높았다.

미사토는 타인에게 자신이 지닌 죄의식을 표현하는 것에 인색하지 않다. 카지와 신지처럼 자신과 가장 긴밀한 관계에 있는 인물들 앞에서는 주저하지 않고 진심을 드러냈으니, 그녀의 죄의식이 진심이라는 것을 의심할 필요는 없다. 하지만 한 번 미안하다고 하거나 농담이었다고 하면서 넘기면 충분할 상황에서도 반복해서 미안하다고 말하는 경향[TVA-01·12]은 그녀가 ‘사회생활’을 매우 강하게 의식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타인과 접촉을 가능한 넓히고 표면적 교제로 도망쳐 그 속에서 자신을 지키려 한다”는 안노 히데아키 감독의 미사토 묘사는 꽤 설득력이 있다. 리츠코와 우정이 사실상 파탄났을 때 그녀의 조롱을 받아치고 도리어 미안하다고 말하는 장면[TVA-22]이 적절한 예시가 될 것이다.

신지의 “미안하다” 발화는 다음 특징을 지닌다. 첫째, 사과가 아스카에게 집중됐다. 발화 12회 중 6회의 청자가 아스카였다. 그 중 5회는 아스카가 신지에게 화를 낼 때였고[TVA-08·10·16·22], 1회는 신지가 카오루를 격퇴하려고 2호기를 공격하면서 원래 주인인 아스카에게 미안하다고 한 것인데 이때 아스카는 병상에 있었다[TVA-24]. 둘째, 의외로 미사토에게 제대로 미안하다는 말을 한 적 없다. 미사토에게 했던 발화는 한 번뿐인데, 그나마도 제4사도전 중 항명을 추궁당하면서 영혼 없이 발언한 공격성 사과였다[TVA-04]. 미사토의 역할을 신지의 유사모친으로 본다면 이해할 수 있는 상황이다. 자녀는 부모에게 죄송할 일이 차고 넘치지만 곧잘 사과하지 않는 법이다.

그런데 신지의 성향을 고려했을 때 12회의 사과는 많다고 보기 어렵다. 아무리 미사토가 사회생활에 잔뜩 길들여진 인물임을 감안해도 그렇다. 이 상황은 『신세기 에반게리온』에서 신지가 처한 상황은 신지가 타인에게 미안할 상황보다 타인이 신지에게 미안할 상황이 많았던 것과 연결하여 해석할 필요가 있다. “미안하다”의 청자로 신지가 포함된 상황은 21회로 『신세기 에반게리온』의 등장인물 중 최다를 기록했다[미주 1]. 공격성을 내포한 사과가 제법 있음을 인정한다. 하지만 신지가 타인에게 피해를 준 것보다 본인이 받은 것이 많았던 만큼 전혀 이해하지 못할 일은 아니다. 아스카는 신지가 조건반사적으로 사과한다고 불만을 드러냈지만[TVA-16], 신지는 적절한 정도로 사과했다고 본다. 만약 신지의 사과가 조건반사적이었다면, 그것은 신지를 윽박지르던 아스카 특유의 발화 때문이었을 것이다.

목욕물이 뜨겁다고 있는 대로 소리 지르는 아스카, 신지는 곧 “조건반사적으로” 사과할 것이다. [TVA-16]

마음을 닫은 사람들 : 리츠코, 아스카

미사토, 신지와 매우 대비되는 “미안하다” 발화 경향을 보이는 것은 공교롭게도 두 사람 각각과 절친한(절친했던) 리츠코, 아스카이다. 리츠코와 아스카의 “미안하다” 발화는 각각 4회가 확인된다. 표본이 많지 않기 때문에 하나하나 자세히 다루려고 한다. 먼저 리츠코가 말한 “미안하다” 4회 중 부탁은 2회, 사과는 1회, 공격은 1회이다. 부탁은 미사토의 집에서 만찬을 들다가 신지에게 레이의 새로운 ID를 전해달라고 하며 말한 것[TVA-05], 미사토에게 1차 제7사도전 이후 네르프 작전부로 쏟아진 민원을 전달하면서 말한 것[TVA-09]이다. 사과는 레이의 테스트를 앞두고 초호기 앞에서 멍 때리다가 마야가 부르는 소리를 듣고 말한 것이다[TVA-21]. 공격은 터미널 도그마에서 기다리다가 겐도를 보고 마기 프로그램을 바꿔서 자폭하게 만들었다고 밝히며 말한 것이다[EOE-25].

리츠코의 “미안하다” 발화에서 특이점이 보이지 않는가? 오랜 친구인 미사토에게 사과한 적이 한 번도 없다. 미사토가 리츠코에게 네 번 사과했다는 사실[TVA-01·16·20·22]과 대비된다. 미사토와 리츠코 사이의 갈등은 이미 전반부에서 표출됐다. 겐도와 후유츠키 모두 자리를 비운 상황에서 미사토가 사도 격퇴에 나서면서 자신의 임무를 수행하고 싶다고 말하자 리츠코는 임무가 아니라 사적(私的) 복수가 아니냐며 비아냥거렸다[TVA-12]. 제11사도 침입 당시 작전부와 기술부를 대표하는 입장에서 또 갈등이 표출됐다[TVA-13]. 둘의 갈등은 후반부에서 한층 격화되어 여러 번 나타났다. 그래도 리츠코는 사과하지 않았다. 신지의 생명을 경시하는 듯한 태도 때문에 미사토에게 뺨을 맞고도[TVA-16·20], 미사토에게 그동안 즐거웠던 가족놀이도 끝이냐고 비아냥거리고도[TVA-22] 말이다. 리츠코의 자존심이 미사토뿐만 아니라 여러 인물에게 좀처럼 사과하지 않는 경향을 만들었을 것이다.

아스카는 리츠코보다 심각하다. 아스카의 “미안하다” 4회 중 사과는 1회, 부탁 겸 공격을 포함하여 공격은 3회에 이른다. 받기 힘든 아스카의 사과를 받은 유일한 인물은 히카리였다. 정신공격을 겪은 뒤 아스카가 미사토의 집에 들어가지 않고 한동안 눌러앉았다가 사과한 것이다[TVA-23]. 호라키에게 했던 사과가 특별한 것은 이것이 아스카의 “미안하다” 발화에서 유일한 문장종결형이기 때문이다. 레이에게 한 사과는 “미안하지만 내 2호기 건드리지 마!”[TVA-10], “미안하지만 방어는 내가 맡겠어!”[TVA-11]로 모두 양보형이었다. 신지가 대신 전화를 받았을 때도 “미안해서 어쩌나?”[TVA-22] 하고 비꼰 것이었으니, 역시 문장종결형도 아니고 진심 어린 사과라고 보기도 어렵다. 즉, 아스카가 진심으로 미안해서 한 사과는 히카리에게 한 것이 전부였다.

리츠코와 아스카는 여러 모로 닮았다. 특히 타인에게 마음을 닫고 있는 성향이 그렇다. 대인간 결전병기 아스카는 더 설명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리츠코가 절친한 미사토에게도 속내를 보이지 않는다는 것은 여러 번 표출되었다[TVA-13·14·17]. 도대체 겐도가 어떤 마성을 지닌 남자인지 따져봐야겠지만, 리츠코가 자신에게 진심을 줄 여지가 없는 겐도와 사랑에 빠진 것은 정말 가엾고 가혹한 일이었다. 미안하다고 말할 필요가 있어보이는 상황에서도 그녀는 미안하다고 하지 않았다. 자신이 지키고 싶은 자존심만큼 타인을 향해 벽을 높이 쌓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리츠코와 아스카는 각각 미사토와 신지에게도 마음을 열지 못하고, 제대로 미안하다고 말하지도 않았다.

미안하지 않은 사회지도층, 미안한 서민

「릴림의 말」 연재를 시작하기로 결심한 것은 「이카리 신지의 여자들」에서 유이를 분석할 때였다. 그때 나는 신지에게 가혹한 운명을 짊어지게 해놓고 한 번도 미안하다는 말을 한 적 없던 유이에게 범인(凡人)의 마음으로 받아들이기 어려운 몰인간성을 느꼈다. 미안하다고 많이 말하는 것만 중요하다고 할 수는 없다. 단 한 번 미안하다고 말해도 그것이 진심이고 작품 전개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면 중요하다. 그렇지만 아들에게 유난히 잔인했던 이카리 부부는 미안하다는 말에 인색했다. 겐도는 초호기에게 뜯어먹히기 직전 뒤늦게 신지를 향해 사과했지만[EOE-26] 너무 늦었다. 유이의 사과는 신지를 게히른에 데려온 것을 후유츠키가 지적하자 자신이 실험 대상이 되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다며 그에게 죄송하다고 한 것이 전부였다[TVA-21].

인류의 판을 설계하는 사회지도층이 미안할 줄 모르는 가운데, 세컨드 임팩트 이후의 척박한 삶 속에서도 서민은 미안할 줄 아는 양심을 간직했다. 토지와 켄스케는 처음 신지에게 폭력을 행사했을 때 공격성으로 발화한 “미안하다”[TVA-03]를 제외하면, 사과하거나 양해를 구할 필요가 있을 때 적절하게 발화했다[TVA-12·17·19] 분명히 사과했다. 에바 3호기에 탑승했다가 중상을 입은 토지에게 히카리가 문병했을 때 두 사람이 주고받은 사과[TVA-19]는 서로를 아끼는 소년소녀의 감성이 험한 세상에도 남아있어 찡하기까지 했다. 막무가내로 사는 것 같지만 매너 좋은 남자 카지는 신지와 아스카에게 적절하게 미안하다는 말을 했으며[TVA-15·17], 미사토에게 유언을 남길 때도 미안하다는 뜻을 전했다[TVA-21]. 카지가 서민인지 의문을 품을 수 있지만, 그가 젤레와 네르프의 지도층과 다른 궤도에서 행동했다는 사실에 주목하면 무리가 아닐 것이다.

시절이 하 수상하지만 않았다면 좋았을 것을 [TVA-19]

[미주 1] 에바 조종사 3인이 함께 들은 사과 1회[TVA-12], 카지가 만취한 미사토를 부탁할 때 아스카와 함께 들은 사과 1회[TVA-15]를 제외하면 모두 신지 혼자 들은 것이다. 신지가 받은 사과 중 공격성이 내포된 것은 토지의 폭행 중 토지와 켄스케의 발화[TVA-03], 미사토의 발화[TVA-07]와 쪽지[TVA-23], 전화를 받아주는 신지를 비꼬던 아스카의 발화[TVA-22]를 포함한 5회이다.